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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원 Dec 17. 2020

군대 선택 기준

국방의무를 실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상당수 남자들의 자존심은 ‘본인의 군인 시절’일 것이다. 이등병, 일병, 상병, 병장을 지나면 전역을 한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남자들은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대한민국 이전의 대한제국이나 조선시대 제국민, 시민들은 병역의무는 없지만, 이미 이곳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국방, 납세, 교육, 근로의 의무를 가진다. 교과서에는 4대 의무는 아니지만, 환경 보전의 의무와 재산권 행사의 공공 복리 적합 의무까지 6대 의무라고 나온다.

국방의무를 실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나는 2000년 6월 5일 군입대를 했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군필 남성들은 부모님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은 잊더라도 본인의 군입대일과 전역일자는 기억한다. 군번과 총기번호까지 기억하는 남자들도 있는걸 보면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군입대 6주쯤 전 ‘영장’을 받았다. 군입대 명령이 적힌 영장은 나와 관련 있지만, 뉴스에서 ‘영장’은 전혀 관련이 없다. 제일 흔한 영장은 영화나 드라마, 뉴스에 나오는 ‘구속수사영장’이다. 검찰측에서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있어 구속수사영장을 신청하면, 영장 심사 전담 판사는 그 내용을 고려하여 ‘발부 여부’를 결정한다. 수용이나 기각 절차를 갖는다. 구속수사 영장을 받는 사람의 마음은 알길 없지만, 내가 ‘군입대 영장’을 받았을 때는 생생히 기억난다. 더불어 ‘육군 소집 통지서’를 왜 영장이라고 하는지 궁금했고, 생각보다 남은 날짜가 길지 않았다. 군 입대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직업이 바뀌는 것이고,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들어가는 것이고, 개인의 거주와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는 동시에 ‘계급과 지위, 의식주와 같은 기본권은 보장’되는 시기를 맞는 것이다. 45일가량 남은 군입대 전까지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다른 나라로 이민가기 직전, 비행기 일정까지 남은 기간에 해야할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둘째 아들이다. 아들을 둘이나 둔 부모 입장에서 군대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만이 있고, 불만이 있더라도 무사히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 호들갑 떠는 부모, 편안해 보이는 부모, 다양하다. 아직 ‘군대 보내는 부모’입장을 겪질 않아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지만,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 때 그 때 달라요~’ 이게 정답이다. 네 살 차이나는 형은 내가 군대가기전에 이미 전역한지 한참 된 예비역이었다. 형은 의외로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는 군대 다녀온 남자들의 ‘필수’인데 형은 거의 이야기 하지 않았다. 고작, ‘차렷 자세가 중요하다’정도만 이야기했다. 차렷 자세를 취했을 때 양쪽 무릎 사이가 벌어지면 안된다고 했다. 나는 어떤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양쪽 슬관절이 붙질 않는다. 다행히 안간힘을 쓰면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반바지를 입고 차렷하는 일보다는 ‘전투복(군복)’을 입고 차렷하는 일이 많으므로 약간의 볼륨감이 있는 전투복 하의를 착용하면 전혀 문제는 없어보였다. ‘없을 것’이라고 형이 안심시켜주었다. 형이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고나 할까? 사실, 우리 가족 중에는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하는 아버지와 나, 전혀 하지 않는 작은 아버지와 형이 있다. 누구의 군생활이 더 힘들었는지 비교해 본다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 것이다. 군생활은 국방의무 실천이므로 ‘누가 더’라는 것은 없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으로서 군대 이야기를 덜 하는 사람이 더 힘들었던 군생활을 했을 확률이 높다. 이 부분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군대 이야기를 하고 있다)

45일 남은 기간 동안 해야할 일을 정리해보자. 군대를 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군대가기전 입대예정자의 마음은 실로 복잡해진다. 22살 남자로서 신체적인 성장은 다 끝났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아직 배울것과 익힑 것이 많은 나이이므로 복잡해졌다.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신체적으로 힘들어질 군생활을 위해 체력 키우는 작업도 필요하다. 2년 2개월간의 거주와 이동의 제한에 대비해 실컫 돌아다니는 것도 필요하다. 계급 사회에 들어가므로 윗 계급이 좋아하는 것을 연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니면 2년여의 시간동안 내 인생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한다는 것을 직시하고 군입대와 군생활이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군대 기간이 내 인생에 활용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는 것이 우선일까?

나는 체격에 비해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율적으로 (혹은 타율에 의해)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자고 있는데 나를 깨워도 일어나야할 시간이라면 크게 화를 내거나 짜증내지 않는다. 심부름 가기 싫어도 ‘심부름에 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되면 즉각 실행에 옮기는 편이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많아지면서, ‘다름의 차이’를 생각하면서, 행동이 굼떠졌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군대를 간다는 표현보다는 보다 정확히 ‘훈련소에 가는 것’이다. 말 그대로 훈련소이므로 심부름을 잘하고, 적응을 잘하는지 여부보다는 내가 주어진 훈련을 잘 소화해낼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입영통지서’를 받은 4월 중순은 살랑살랑 불던 봄바람과 따뜻한 여름을 맞이하는 봄과 여름이 섞인 날씨였다. 겨울과 봄이 얽힌 날씨가 아니라, 봄과 여름이 섞인 계절이었으므로 ‘길바닥’에 잘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사실 입영통지서만 나오지 않았지 내가 군대 간다는 사실은 기정사실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만난 96학번의 ‘이민호, 이대영, 김명규’ 이 분들을 아직도 잊을수 없다. 군대가기전 후배인 나와 전역한지 얼마 안된 3명의 선배들은, 무슨 이유인지 처음 다시 만난 그날부터 혼연일체가 되어 술을 마셨다. 명분은 대화를 나누기 위한 것이지만, 시작은 술이었고, 그 다음이 대화였다. 본인들의 군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런 저런 사전 준비사항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한명은 육군 보병, 한명은 면제, 한명은 국도 과적차량 단속 업무를 했기 때문에 귀담아 들을 이야기는 ‘훈련소’ 이야기 뿐이었다. 이들도 훈련소 시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기억이므로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 ‘매우 불편했고, 매우 힘들었던 이야기’가 상당했다. 체력적으로 힘들 예정인 훈련소 입소를 앞둔 2년 후배에게 해준 이야기들과 함께 기울여준 술자리가 감사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신 술로 인해 나의 훈련소 생활은 더 힘들었다. 복학생 3명과 입대전 3학년생 1명이 ‘달리기, 헬스, 등산 등’을 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이들과 함께한 3학년 1학기의 추억은 잊을수가 없으며 너무나 감사하고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소중한 선배들을 통해서 인생의 소중한 기록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수 있어 무척 기쁘다. 2000년은 21세기의 첫 시작이다. 1999년에서 2000년이 넘어갈 때는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다. 1999에서 2000이 되면 컴퓨터 시스템의 붕괴로 전세계가 혼란에 빠질 것이란 이야기도 많았다. 심지어 Y2K라는 세기말 가수도 있었다. 1999년은 대한민국 프로야구에서 홈런 신기록이 나온 해였다. 삼성라이온스 이승엽 선수가 한해 45개의 홈런을 친 것이었다. (국민학교시절엔 해태타이거즈의 팬이었다. 그때는 해태가 제일 잘했다. 해태 타이거즈가 기아 타이거즈로 바뀔즈음 팀보다는 선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중학생이 되면서 야구보다는 농구에 관심이 늘어났고, 대학에 입학한 이후 비로서 다시 임창용, 양준혁, 이승엽 등 삼성 라이온스 선수들이 좋아지면서 다시 삼성 라이온스 팬이 되었다) 45개의 홈런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입영통지서를 받은 이후 45일간 이승엽이 작년이 친 홈런의 갯수보다 많은 술병을 만들어 내리라 다짐했다. 술은 인생에서 훌륭한 업무 파트너가 된다. 적당한 알콜은 서먹서먹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준다. 45일간 45병의 술을 설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는 훈련소 입소후 정확히 알았다. 더 정확히 3학년 1학기 휴학후 1주일 쉬는 동안 알았다. 나는 6월 5일에 훈련소에 입소했다. 3학년 1학기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상당수 교수님들이 배려해주셨다. 중간고사 성적을 그대로 이어주신 분도 계셨다. (김상회 교수님) 레포트로 대체해주신 교수님도 계셨다. (한상일 교수님) 레포트로 대체해주신 교수님 가운데는 최고 성적 상한선을 B+로 제한하신 교수님도 계셨다. (이종찬 교수님, 김동명 교수님외 3명) 노트 필기를 가지고 성적을 주신 매우 훌륭한 교수님도 계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박호성 교수님은 나의 노트를 직접 꺼내 들고 A+의 노트 필기니 참고하라고 하셨다. 복학하고 찾아뵈려 했으나 안 계셨다. 지금 지금을 통해서 감사하단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학사 일정에는 지장이 없었다. 장학금을 못 받는데도 큰 지장이 없었으니 ‘무념무상’의 마음이었다. ‘박호성 교수님 같은 분만 계셨으면’ 군대가기 전에도 장학금을 조금 받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부모님께 전해드렸다. 부모님은 그런 걱정은 하지말고, 연신 몸 다치지 말고 군대에 다녀오라는 말씀만 하셨다. 4월 중순이후부터 한달 내내 작년 이승엽이 친 홈런의 갯수보다 많은 술을 마신 이후 5월말일경에 안동으로 갔다. 이승엽의 홈런기록보다 많은 술병을 만들겠다는 작은 목표는 달성했지만 몸은 많이 힘들었다. 5월말일부터 6월 3일까지 정말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훈련소로 갔다. 결국 신체적으로 힘들어질 군생활을 대비한 체력훈련은 전혀 하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고 안했다. 시간이 있었지만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군입대를 앞두고 신경써야할 두번째는 계급 사회로의 진입에 따른 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급사회로 진입은 분명하지만, 나와 비슷한 나이대에서 계급의 차이는 큰 의미는 없어보였다. 실제로 대학생활하면서 나보다 5살많은 형이나 누나들과 맞먹는 경우도 많았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공손하게 하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공손한 것이 곧 계급사회의 기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설령 나이는 적더라도, 나보다 먼저 군대라는 시스템에 적응한 것에 대한 보상의 의미와 계급이 높아지면 발생하는 ‘권한과 책임’의 문제도 계급이 주는 부담이 생각했다. 그래서, 선임병들을 위한 준비는 전혀없었다. 사랑받는 후임병이 되기 위한 몇가지 조건이 있다. 군 입대 전의 직업은 대다수가 ‘학생’이거나 ‘직장인, 개인사업’정도 된다. 간혹 수는 많지 않지만 운동선수, 영화배우, 가수, 탤런트 들이 군 입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이 선임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편이다. 아무래도 소수이다보니 그 직업을 하면서 만난 사람, 있었던 일에 대한 관심이 많다. 20대 초반에는 연예인과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은 시기이므로 당연하다. 나를 소개해야할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민호형에게 물어봤더니 그런것도 신경쓰지 말고 그냥 아무생각없이 다녀오라고 했다. 관심받을 만한 직업이 아닌 이상 똑같다고만 했다. 계급 사회는 계급이 갖는 권한만큼의 책임과 의무가 있으므로 낮은 계급이 무조건 불리하지는 않다. 그래서 두번째 항목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끝으로 세 번째는 ‘군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2년 2개월은 선으로 이어진 긴 인생에서 약간의 ‘긴 점’일 뿐이다. 군 생활 이전의 기간이 군생활을 도와준다. 군 입대 직전 운동은 하지 않고 술 마시면서 허비했던 시간들로 인해 훈련소 생활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이내 적응을 하고 6주간의 훈련소 마지막 즈음에는 체력적으로 뒤쳐지는 일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군 생활’이후를 위한 ‘군 생활’의 역할을 미리 정의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군생활이 이후 생활을 좌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군 생활로 인해서 그 다음이 원만히 진행돼야 한다. 간혹 군대에서 신체적, 정신적 부상을 입는 경우가 있다. 정말 안타까운 경우가 빈번하다. 군생활에서 얻어지는 사고나 각종 후유증 보다 좋은 추억들이 더 많을 것이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여객 수송용 비행기의 사고 확률은 지하철이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이나 자가용 승용차 보다 훨씬 낮다고 한다. 하지만 여객 수송용 비행기 사고가 발생하면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나다. 뉴스에 자주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교통사고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암이나 뇌혈관 질환,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하는 경우보다 훨씬 적다. 그렇지만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이 남기게 되는 상처의 크기나 고통은 훨씬 크다. 군대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는 이후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부모님과 가족들은 ‘몸 조심해서 다녀와라’는 말씀을 반복하신다. 심지어, 이등병 일병 상병을 거쳐 병장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고 군생활을 하는 것은 기본이다. 2년을 준비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2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나는 그 2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22살 6월에 군대가서, 24살 8월이면 전역할 예정이었다. 24살에 곧바로 복학을 하고 26살이면 대학 졸업을 앞둔 상태에 놓일텐데, 22살부터 23살 그리고 24살의 8개월을 그냥 보낼수는 없는 노릇이다. 26살이 왔을 때 ‘학생이거나 무직’상태이고 싶진 않았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무작정 학생일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을 당겨서 22살이 아니라 20살에 군대를 갔더라면 하는 후회를 할순 없었다. 비록 45병의 술을 마셨지만, 20살과 21살의 대학 생활 경험이 22살의 군 생활에도 보탬이 됐으니까 시간을 돌리는 것을 불가능할뿐더러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옳지도 않았고 그럴수도 없었다. 전역 이후 뻔히 예상되는 미래를 위해 나는 2년의 군생활을 활용해야 할까? 국방의무를 실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주어진 장소에서 임무에 충실하면 그뿐이다. 25살 이후 삶을 대비하는 시간으로 국방의무 실천시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시험의 부담없이 2년여동안 영어에 노출되는 환경이라면 영어를 잘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을것 같았다. 그리고 현대인의 이동수단의 필수품인 자동차에 대해서 배우고 싶었다. 끝으로 막연히 컴퓨터를 배우고 싶었다.

군대는 시간이 되면 가는 곳이 아니라, 그곳 역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된다는 말,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은 궤변이 아니다. 주도권, 선택권을 갖지 않으면 책임은 사라지지만 선택하지 않은데서 오는 아쉬움은 변하지 않을 뿐더러 다른 선택에게 부담으로 남게도니다. 병무청에 알아보면 ‘지원가능한 모집안내’를 확인할 수 있다. 육군의 경우, 기술행정병, 취업맞춤특기병, 유급자지원, 전문특기병, 어학병, 카투사, 동반입대병, 직계가족보구부대병, 연고지복무병 등이 있다. 전문특기병에는 ‘지식재산관리병, 특공병, 기독교군종병, 불교군종병, 천주교군종병, 영상콘텐트디자이너병 등 다양한 특기병이 있다. (병무청 홈페이지, 군지원(모병)안내 참고, 2020년 3월 29일 기준) 내가 관심이 있던 어학병과 카투사는 공인 영어시험 성적이 필수다. 어학병은 매우 어려워보였다. 토익 성적이 900점이상 필요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학병은 거의 없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카투사가 지원가능했지만, ‘특이해보이기 싫어서, 튀기 싫어서’ 지원을 포기했다. 대학 입학이후 장교임관을 위해서 ROTC같은 것을 준비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역시도 ‘특이한 복장’이 ‘튀어 보여서’ 포기했다. 선택지는 자동차 정비를 할수 있는 운전병이나 행정병이 있었다. 자동차 운전병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운전면허도 있었고 관심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 운전병이나 정비병 같은 경우에는 작은 실수도 큰 사고로 이어질수 있으니 ‘군기’가 매우 엄격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타도 좀 있다고 했다. 폭력을 싫어했고, 누구에게 맞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으므로 운전병도 쉽게 포기했다. 마지막 한가지 ‘행정병’이 남았다. 행정병은 카투사와 운전병처럼 군 입대 전에 미리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훈련소 이후 자대배치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나는 행정병을 선택했다. 병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술할순 없지만, 후회없는 행정업무를 했다. 밤새워 컴퓨터 작업을 했고, 각종 서류와 명령서를 만들었다. 포상 휴가를 위한 서류 작업도 했다. 군대내 감오기라는 영창 입소를 위한 서류도 만들었다. 서식이 있었지만, 매우 정교해야했고 오타가 허용되지 않는 서류여야 한다. 간결한 표현도 중요하다. 문서작업이긴 하지만, 군대 내 물건이나 재고 관련해서도 서류상 한치의 오차가 허용되지 않는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수치 계산이 필요하다. 훈련계획서와 훈련결과보고서, 주간 계획표와 주간 결과보고서, 월간, 분기, 반기, 연간 계획표와 결과보고서가 필요하다. 예습과 복습이다. 손재주도 좋아졌다. A4용지 한장정도되는 종이를 2미터가 넘는 식당간판을 만들기도 했다. 프린터와 복사기, 그리고 각종 접착용 사무용품들만 있으면 못만들게 없다. 지도도 많이 만들었다. 각종 훈련에 필요한 지도와 사진 등이 담긴 상황판은 한달에 한두개씩은 꼭 만들었다. 가장 힘들었고 재미있었던 것은 휴가와 외출 외박 일정을 감안하고 ‘공평하고 공정하게’ 100여명의 부대원들의 근무명령서를 짜는 것이었다. 특히, 나도 외출과 외박이 있었기에 10일 가량의 근무명령서를 미리 만들어두는 것은 매우 큰 일이었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미래를 계획하고, 실행한 일에 대해서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상황판 제작을 위해서 사무작업을 하면서 손에는 여러 흉터가 생겼다. 워드프로세싱, 파워포인트 등의 소프트웨어를 익숙하게 사용할 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그러나, 늘 잠이 부족해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은 기억이다. 실수로 후임의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하여, 본의 아니게 탈영을 하여, 영창서류를 꾸몄던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아끼던 후배는 작은 실수로 인해 군생활을 조기마감하게됐다. 수술 상처와 신체적인 회복이 덜 된 상태에서 전역을 앞둔 후배를 보면서 서류 작성하는 내내 눈물이 났다. 군대는 역시, 아프지 않고 잘 다녀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국방의무는 각자 맡은바 역할을 충실히 하면 된다. 너무 많은 준비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재미도 없다. 국방의무를 마친 사람들은 자신감이 있다.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세상걱정 다 가진 이등병부터, ‘세상아 나에게 오라, 나는 자신 있다’는 병장시절까지 겪었던 다양한 인간상들과 훈련, 내무반 생활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몸 건강히 잘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군생활이다. 입대하면서 부터 갖고 있던 작은 수첩이 있다. 매일매일의 일기를 적었고, 매일매일이 지나면 x표시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800일에 5일 정도 모자라는 군생활 내내 하루도 놓치지 않고 들여다본것 같다. 좋았던 일, 힘들었던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을 선사해준 군생활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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