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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면 Sep 28. 2022

수수한 이야기_ 우천 시에도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나의 경주 여행 일지

서라벌 사거리에 내리자마자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날이 흐리긴 해도 비 소식은 없었기에 당황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하며

핸드폰으로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새벽에 봤을 때와 똑같이

하루 내내 흐림 표시만 있었다.

당연히 짐가방엔 우산은 없었다.

새 우산을 살 생각도 없었다.

자취방엔 이미 크기와 색상이 각기 다른 우산이

네 개나 되니까.


막 쏟아지는 비는 아니어서

그냥 맞으면서 숙소까지 걷기로 했다.

걷다 보니 나처럼 미처 우산을 준비 못 한 여행객들이 많았다.

다들 곧 그칠 비라고 여기는지

여상한 태도로 거리를 구경했다.

덕분에 나도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길치이기도 하고 방향치인 나는 이번에도 숙소를 한 번에 찾지 못했다.

네이버 지도는 분명히 여기가 목적지라고 하는데, 도저히 보이질 않았다.

두어 번 골목길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고 나서야, 예약한 숙소 문패 발견.

잔디가 깔린 조그만 마당을 지나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분위기 있는 음악과 기분 좋은 풀향,

따뜻한 불빛이 반겨 주었다.

도착하기까지 특별한 고난을 겪은 것도 아닌데

오느라 고생했어, 하고 말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점심 메뉴는 좋아하는 파스타로 결정했다.

가게와의 거리는 숙소에서 단 4분.

이리저리 꺾어지거나 하는 길도 아니어서

금방 도착했지만 아쉽게도 대기가 길었다.

30분쯤 기다렸다가 입장해 맛있게 먹은 파스타.

태국 음식 같다는 후기를 봤는데 공감이 갔다.

왠지 파인애플 주스를 곁들여 먹어야 할 것 같은 맛.

새우가 어찌나 크고 통통한지 입 안이 가득 차

볼을 우물거릴 때 행복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니

빗방울이 멎어 있었다.

역시 지나가는 비였어,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첨성대와 대릉원을 향해 출발.

난생처음 마주한 첨성대는

내 생각보다 훨씬훨씬 컸다.

늘 교과서 한쪽 귀퉁이에 실린 사진으로만 봐서 그런가, 무의식적으로 작을 거라 느꼈던 것 같다.

실제 크기의 반의반도 안 될 거라 여겼으니.

형태 보존이 워낙 잘되어 있어서

모형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밤에 다시 찾았을 때 조명을 받은 모습도 궁금했다.


잠시 주변을 산책하다 대릉원에 입장했다.

몇 발자국 내딛지 않아

청량한 나무 냄새가 밀려왔다.

숨을 깊게 내쉬며 걸었다.

얼마 안 가 sns에서 유명한 포토존에 도착했다.

수학여행 혹은 소풍을 온 듯한 초등학생들이 있어서 줄이 꽤 길었다.

웬만하면 포기했을 텐데 풍경이 너무 그림 같아서 꼭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대기줄에 함께 선 사람들은 저마다 포즈와 구도를 연구하고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뛰놀다 메뚜기를 잡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대기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진이 조금 아쉽게 나와도 웃으며 금방 자리를 비켜 주는 커플과

대충 한두 장만 찍어 달란 내 요청에 선뜻 대충 말고 최선을 다해 찍어 주겠다며 예쁜 사진 남겨 주신 여자분의 호의, 그런 고운 마음들 덕분에

길고 길었던 기다림의 시간이 꽃처럼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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