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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면 Oct 03. 2022

수수한 이야기_월정교의 인연

나의 경주 여행 일지

잠자리에서 다음 날 불국사와 석굴암을 가느냐 마느냐 한참 고민하다가

거리가 꽤 멀기도 하고 제대로 둘러보려면 

몇 시간이 소요된다는 후기를 보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 가고, 느지막이 일어나면 월정교와 황리단길을 구경하기로 했다.


새벽녘에 한 번 눈을 떴다가 한 시간만 더 자자, 하고 눈을 감았다 떴는데

아홉 시가 다 되어 있었다.

푹신한 침구 때문인지 전날 마시고 잔 와인처럼 유독 잠이 달았다.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간단히 정리한 뒤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 오픈 전인데도 대기하는 팀이 여섯이나 되었다.

마련된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데

제법 굵은 빗방울이 툭툭.

아, 오늘만은 제발 맑기를 바랐는데.

식사하는 동안 우산을 사지 않겠다던 굳건한 다짐(?)이 흔들릴 정도로 빗줄기가 세졌다.

그래도 육회 비빔밥은 꽤 맛있었다.

한 그릇 말끔히 비우고 식당 밖으로 나서니 갑자기

이 비를 이겨 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대충 정수리만 가린 채

잰걸음으로 황리단길에 들어섰다.

목적지인 사진관에 가기 전에 괜히 소품샵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도 했다.

사진관에서 셀프로 사진을 찍고 나오니

거짓말처럼 날이 개어 있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짐부터 물품 보관소에 맡겼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다음엔,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작은 컵에 녹차맛과 호지차맛을 반반 담아

2층으로 올라왔다.

창밖을 구경하면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야옹이와 똑같은 삼색이를 봤다!

녀석은 지붕을 타고 어딘가로 쓱 사라졌다.

만나서 반가웠어.


월정교로 가는 길은 동궁과 월지만큼이나

꽤 멀었다.

걷고 걸어 도착한 월정교.

이곳도 야경이 유명해 낮에는 여행객이 드물었다.     

다리를 한 번 왔다 갔다 하고

징검다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익숙한 멘트가 들렸다.     


“혼자 오셨어요?”


네, 라고 대답하면 십중팔구 ‘저, 그럼 사진 좀...’ 하는 부탁이 따라왔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여자분은 혼자였다.

사진은 얼마든지 찍어 줄 수 있지만

‘예쁘게’ 찍어 줄 자신은 없었다.

그 점을 고지하자 여자분은 괜찮다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찍어 주고 내 사진도 부탁했다.

그렇게 금방 헤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여자분은 가져온 소품이 있다며 비눗방울과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직접 시범을 보이며 내게도 빌려주고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핸드폰에 내 인생샷이 가득 했다!)

자연스레 몇 마디 주고받다 같이 택시를 타고 황리단길로 돌아와 카페까지 가게 되었다.

마침 서로 정해진 일정이 없었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편안하게 이야기 나눴다.

그동안 혼자 여행할 때 만났던 많은 인연들처럼.


“저거 해 보셨어요? 연애운, 재물운 같은 거

알려 주는 뽑기요.”

“아니요. 해 보셨어요?”

“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거기서 ○○띠를 만난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랑 무슨 계획을 세워서 뭘 한다고…….”

“○○띠요? 저 ○○띠인데.”

“진짜요?!”


나도 신기했다.

그 얘기로 우린 한참 와와, 하며 놀라워했다.


곧 기차 시간이 가까워져 늘 그렇듯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분은 하루 일정이 더 남았다고 했다.


KTX 안에서 창밖을 보는데

자연 풍경은 짧고 터널은 길었다.

그게 꼭 삶처럼 느껴졌다.

초록초록 푸른 날들은 짧고,

어두컴컴한 날은 야속하게 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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