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올해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역사서
이 책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책에 대한 평가 한 문장 때문이었다. 이런 수식어야 많이 사용되고, 그런 수식어 때문에 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음에도 이 책을 골랐다는 건, 언제나 느끼지만 책과 사람과의 인연이란 것이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이유는 독서모임에서 이 책이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추천했고, 투표에서 선택됐다.) 그렇지 않았다면, 끝까지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니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다. 위 두 가지 이유 덕분에 (정말 덕분이다), 본문만 800page, 색인 포함 총 1007 page에 달하는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정보를 다시 찾아봤다. 1024쪽 | 1589g | 152*232*60mm...... 두께 6cm...) 책의 두께로만 치면 그동안 읽었던 모든 책들 중 최고 수준이다. 만약 이 책의 실물을 먼저 봤다면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으려 했을까... 사진에서는 이 책의 부피감과 무게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은 충격적인 책과의 첫 만남 이후, 이 책과 한 달 정도를 함께 보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우선, 가지고 다니면서 볼 수 없었다. 도서관 갈 때 가져간 한 번을 제외하고, 이동하면서 보려고 가지고 나간 적은 없다. 손에 들고 보기도 어려웠다. 위에 나와있듯이, 무게가 1.5kg이다. 마냥 쉽게 들고 볼 만한 수준이 아니다. 항상 독서대 위에 올려놓고 책을 봐야 했다. 출퇴근 시간이나 이동시간에 보지 못하니, 결국 퇴근한 뒤 집에서 잠시, 대부분은 주말에만 볼 수 있었다. 나름 장점도 있었다. 매일 조금씩 보면 흐름이 잘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주말에만 보니 그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읽는 시간은 많이 걸렸다.
글은 잘 읽혔다. 신기한 일이다. 역사에 그리 큰 관심이 있지도 않고, 이미 책의 크기에 압도된 사람이 보기에도, 이 책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서술되어 있다. 일차적으로는 생소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한 저자의 능력이겠지만, 역자의 공 역시 크다고 생각한다. 그 흔한 (크게 거슬리는) 오역 한 부분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잘 번역되어 있다. 책의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저자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고민하게 되는 순간, 그 책의 매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만다고 생각한다. 이 많은 내용을 즐겁게 읽을 수 있게 해 준 역자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앞으로 이재황 님의 번역서는 찾아서 읽어볼 것 같다.
제목에도 나와있듯이, 이 책은 기존의 세계사를 보는 관점과는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스-로마 시대와 르네상스를 거쳐 대항해시대, 제국주의, 1,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 세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세계사의 흐름을 실크로드, 지역으로는 중앙아시아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이 지역이 동방과 서방을 이어주는 '문명의 교차로'이며, 실크로드는 '세계의 중추신경계'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문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세계 역사를 한 사람이 서술한 책이기에, 자신만의 관점과 흐름을 가지고 이야기가 이어진다. 책을 읽는 내내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정보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느낌을 받았다. 학교 역사시간에 시험을 위해 공부한 내용들이, 조금이나마 정리되는 느낌이랄까. 물론 역사교과서와는 다른 관점에서.
하지만, 많이 접하지 못했던 나라와 인물, 사건들을 설명하기에, 조금 더 다양한 보조자료가 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이라크, 이집트와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등 다양한 나라와 도시들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 적이 없었다. 구글맵을 이용해 주요 도시나 나라를 검색하면서 책을 읽었지만, 그렇게 보는 게 쉽지는 않았다. 책 중간중간 당시의 지도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너무 부족하다. 각 장의 시작 부분에 그 장에서 설명하는 지도가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아틀라스 시리즈 中 가장 최근에 나온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나, 유사한 잘 만들어진 지도책이 있었으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미있다. 소설은 아니지만, 단순히 외워야 하는 교과서 같은 서술이 아니라, 흐름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다. 역사책을 제대로 본 기억이 거의 없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본 역사책이 이 책이어서 다행이다. 언젠가는 보려 했던 역사책들은 많은데, 보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커졌다. 다양한 관점의 책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이 정도 두께의 책도 봤는데, 뭐든 못 볼까 싶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면
1300년대 중반 확산된 페스트로 유럽의 노동력이 급감하자 노동력의 가치가 커지고, 부가 하층 계급으로 이동했다. 식생활과 전반적인 건강의 개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기대 수명이 늘어나고,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 번영으로 인해 기존 체제가 강고했던 남부 유럽보다 북서 유럽에 더 큰 변화를 일으켰다. 체제의 유연성과 경쟁을 긍정하는 태도와 함께, 지리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한 투철한 직업의식, 즉 근면 혁명을 이루었고, 이는 18세기 산업혁명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근면혁명'을 찾아보니 해석부터 그 관점에 대한 비판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었다. '경제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은데,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접근하기엔 어렵고, 알아야 할 내용도 많은 듯하다. 페스트로 인한 사회 변화의 모습이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여서 흥미로웠다.
총 25개의 장 中 2개의 장을 제외한 모든 장은 '~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2개 장 중 1장 '실크로드의 탄생'과 달리 22장 '미국의 실크로드'는 왜 굳이 다른 제목을 썼는지 잘 모르겠다. '미국의 길'이라고 해도 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분명 이유는 있을 것 같다.) 이 중 19장 '밀의 길'과 20장 '대량학살로 가는 길'은 2차 세계대전 시기를 서술하고 있다. 아주 거칠게, 간략히 요약하면 독일(히틀러)은 식량과 자원을 얻기 위해 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고, 동맹을 맺은 소련까지 침공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고, 결국 부족한 자원을 아끼기 위하여 모두가 알고 있는 끔찍한 대량학살을 시작했다.
잉여 구역에 대한 생각으로 소련을 공격했지만, 이제 생각은 잉여 인구를 처리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 649p
아랍 세계가 (그동안 패권 국가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자행한 수많은 악행 때문에) 독일을 지지한 것도 그동안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식량을 구하지 못하니 사람을 죽여야겠다'라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그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흐름이 잘 이어져서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 내용에서 잠시 떨어져 생각해보니, 너무 이상한 결론이었다. 물론, 유사한 사례는 역사상 많은 곳에서 있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표류하고 있는 바다에서 먹을 것이 없어지자 동료를 먹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이 이루어진 원인, 학살에 의해 희생된 사람의 숫자, 그 과정을 겪었던 사람들의 경험담 등을 생각해볼 때, 아래와 같은 문장은 견디기 힘든 감정을 전해줬다.
1942년 1월 20일 추운 날 아침에 도달한 결론에 주어진 이름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보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청소는 그저 문제에 대한 대응일 뿐이었다. 유대인 대학살은 '최종 해결책'이었다 - 650p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프리모 레비의 많은 책들은, 그저 누군가가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서구 중심적인 역사관에서 탈피한 역사책을 쓰고자 한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서양과 동양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서구 중심적인 태도를 보인 부분들은 아쉬웠다. 이 책에는 중국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 모든 사건을 다룰 수는 없기에, 그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 대해 편파적인 느낌을 주는 서술들이 많이 보였다.
중국의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은 개략적이고 제한되어 있었다... 이 책은 이 시기의 다른 많은 여행자들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부정확한 내용과 신화에 가까운 믿음들로 점철되어 있다... 에스파냐의 멜론은 지름이 2미터 가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남자 스무 명 이상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312p
사절 조반디 다 피안 델 카르피네의 기록은 이 시대에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은 개, 늑대, 여우, 이가 먹을거리로 간주되는 세계였다.... 어떤 사람들은 말발굽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개의 머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280p
서양이 동양을 서술한 기록은 상당히 많이 나오고, 대부분 가치중립적으로 적혀 있다. 반면 중국이 서양을 기록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와 함께 서술되어 있다. 아래 몽골에 대해 서술한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몽골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고, 정치적으로 약삭빠르며, 종교적으로 너그러웠다. 304p
몽골의 세계 정복이 단순한 힘의 우위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결과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 책 내용을 통틀어, 자신들이 지배한 국가를 다루는 방법은 몽골 제국이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약삭빠르다.'라는 서술은 이 부분 이외에는 없다. 똑같은 내용을 앞부분에는 '수완이 뛰어나다'라고 표현했다. (워낙 저 문장 전후에 있는 몽골에 대한 서술이 긍정적이기에, 정말 저 단어를 사용했는지, 비하의 의도가 있었는지 약간은 의문이다.) 이런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내가 동북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비슷한 예로,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서술에서도 약간 다른 뉘앙스가 느껴진다. 큰 틀에서는 '제국주의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라고 설명하지만, 영국에 비해 미국, 특히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 설정 과정을 훨씬 더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 당시 미국의 선택을 미국 사람들은, 중동 사람들은, 아무 관계없는 제3 국의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좀 더 많은 관점을 알아가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알고 있는 사실이 많을수록 쉽고 재미있게 읽혔다. (아는 만큼 보인다!) 초반부보다는 서구사회가 주도권을 잡은 시점부터 좀 더 재미있어졌고, 1,2차 세계대전부터 그 이후를 다룬 마지막 부분은 쉬지 않고 읽었다. 들어본 나라와 인물들이 나오는 부분은 그걸 좀 더 자세히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각 부분을 자세히 다룬 책들을 보고 이 책을 봤으면 더 재미있게 보지 않았을까, 반대로 이 책을 읽고 자세히 다룬 책들을 보면 한 번 간략하게나마 훑어봤기에 조금이라도 더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는 파고들기 시작하면 정말 끝이 없을 것 같다.
마지막 2,3장 정도가 최근의 이야기로, 미국과 함께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이 주요 등장 국이다. 모두 내가 태어난 이후의 이야기로, 뉴스에서도 많이 봤고,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내용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배경은 어떤지 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체, 그저 먼 곳의 뉴스로만 소비하고 있었다. 사담 후세인이 미국의 가장 좋은 친구였고, 미국의 배신이 그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았다니.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을 살아왔구나'라는 자각에 한 편 섬찟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겠다.
역사는 왜 공부해야 할까? '문사철'의 한 영역으로 예부터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었기에 그 이유를 설명한 글들이 많겠지만, 현재 나에게 떠오르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이다. 우선,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준다. 지금의 나는 내가 속한 사회의 결과이다.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이 겪은 일들이 그분들을 형성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우리나라가 겪은 많은 일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을 만들었다. 내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지,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역사를 통해 나의 모습과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데 힌트가 될 수 있다. 기술과 사회의 변화와 발전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같다. 옛 선조들이 생각하고, 느끼며 함께 살아온 일들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나에게 닥치는 많은 일들에 대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역사를 통해 그 판단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목적이 새로운 내용을 접함으로써 나를 어떤 형태로든 자극하는 것이라면, 많은 내용들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중동, 칭기스칸, 아프리카 등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알아보고 싶어 진 내용에 대한 책들을 정리하며, 마무리한다.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김호동 / 2016)
총균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 2005)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김형오 / 2016)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 2005)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 판 다이크 / 2005)
대한민국사 1~4 (한홍구 / 2003~200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 / 2005~2013)
그레이트 게임 (피터 홉커크 / 2008)
미래의 아랍인 1,2 (리아드 사투프 / 2015, 2016)
최악의 동반자 (장 피에르 필리유, 다비드 베 / 2013)
아랍의 봄 (장 피에르 필리유, 시릴 포메스 / 2014)
팔레스타인 (조 사코 / 2002)
페르세폴리스 (마르얀 사트라피 / 2005, 2008)
평화의 사진가 (에마뉘엘 기베르, 디디에 르페브르 / 2010)
앨런의 전쟁 (에마뉘엘 기베르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