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자. 계속.
너무 힘든 책(Peter Frankopan/실크로드 세계사)을 읽은 반작용으로, '좀 쉽고 빠르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보고 싶다는 독서모임 친구들의 바람을 듣고 바로 떠오른 책이 '82년생 김지영'이었다. 제목을 접한 지는 오래됐고, '한 번 봐야지' 하는 마음은 항상 있었기에 추천했는데, 바로 다음 책으로 선택됐다. 다 읽고 난 느낌은... 양이 많지 않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쉽게 읽히지만, 쉽지는 않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재밌지는 않았다......
여동생이 한 명 있고, 남녀공학만 (반은 따로) 다녔고, 대학 전공은 남자가 많았던 물리학, 엔지니어 10년 차, 결혼 4년 차.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평범하게 살아왔다. 살아온 내내 남자가 많은 집단에 속해 있었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었음에도) 여자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다. 이 책에 적혀있는 에피소드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나도 그 가해자 中 한 명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행동하지는 않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일을 거들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속 남성 등장인물들과 지금의 내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주변에 아이 엄마, 아빠는 많다. 특히 워킹맘들의 어려움을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 회사는 출산/육아 휴직제도가 잘 보장되어 있어 이걸 사용하는데 제약은 없다. 하지만 각자 나름의 고민을 하고, 무엇인가를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한다. 과 선배이기도 한 여자 선배는 3명의 아이를 낳았고, 4~5년 만에 회사에 복직했다. 똑똑하고 일도 잘하는 선배였기에, 다들 한편으로 '아쉬워'했다. 회사에서의 평가는 더 이상 좋게 받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음을 그 선배도, 주변 사람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 후배는 10월 말에 아이를 낳아 출산 휴가 3개월만 쉬고 바로 회사에 복귀했다. 그 해 평가가 끝나는 시점에 아이를 낳고, 차년도가 시작되는 시점에 복귀한 것이다. 평가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는 선택이다.
아침 8시 좀 넘어 시작하는 아침 미팅에 엄마들은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니 야근도 어렵다. 회식은 1년에 한두 번,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계획을 사전에 명확히 해야만 가능하다. 유치원에서부터, 특히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학교에서 부모를 부르는 일도 많은 것 같은데, 가끔 참석하는 것도 회사 눈치가 보이고,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다른 부모들 눈치가 보이는 것 같다.
김지영 씨의 회사처럼 대표가 대놓고 입사시점부터 남녀차별을 하지는 않지만, 일의 난이도도 높고, 달성하기 정말 어려우나 성공한다면 큰 성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은 많은 경우 남성 엔지니어가 담당자가 된다. 그 업무를 진행하는 동안 그 엔지니어는 많은 고생을 하겠지만 (야근이 늘어날 테고, 주말 출근도 잦아질 것이다.) 끝나고 나면 본인을 어필할 수 있는 큰 성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자의반 타의반 그런 기회들은 여성 엔지니어보다 남성 엔지니어에게 돌아갈 확률이 높다.
본인의 성과로 평가를 받게 되는 이런 상황에서 가정과 회사 중 어느 한쪽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을 누구나 하고 있다. 누군가는 가정/아이에게 더 집중할 것이며, 누군가는 '지금이 성과를 낼 때'라는 생각으로 조금 힘들더라도 업무에서의 성과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는 그 안에서의 절충점 (시간을 많이 투입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성과는 낼 수 있는 업무)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0년 차가 되면서, 중간 위치가 되어 후배들을 데리고 일을 하고 있다. 그중 여자 후배들도 있다. 다들 정말 똑똑하고, 일도 잘 한다. 어떻게 하면 이 후배들이 주변 (남자) 동기들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게 할 수 있을까. 올해 내내 가장 큰 고민이다. 내 할 일 하기도 벅차 후배 걱정까지 해줄 능력은 안되지만, 그래도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에는 즐겁게 일하고, 좋은 평가도 받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다른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으로 회사에서의 본인의 위치를 만들어나갔으면 좋겠다. (같이 일하면서 혹시 불편해할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을지는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아직 아이가 없다. 와이프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내가 와이프한테 아이를 가지자고 이야기해본 적은 없다. 나에게 벌어질 생활의 변화와 와이프에게 일어날 변화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와이프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의사를 전적으로 존중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딸이 태어난다면, 지금보다는 더 좋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또 내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김지영 씨와 같은 경험을, 삶을 살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실천해야겠다. 일단, 주변 남자들에게는 꼭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있다.
마지막 의사의 생각은, 바로 직전 김지영 씨와 부인에 대한 생각과는 너무 차이가 커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작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위에 적어놓은 글에서 여성분들이 보기에 불편한 지점이 있다면, 나는 내 생각이 불편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여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알고, 바꿔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