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함께 신화를 읽는다는 것
무엇인가를 접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우연의 연속인지. 그 흔한 '그리스 로마 신화' 조차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내가 '북유럽 신화'를 읽게 될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히어로물을 좋아하는 와이프 덕분에 마블의 영화들을 섭렵했지만, '토르'에게는 별 호감이 생기지 않아 시리즈를 따로 찾아보지 않았다. 마블 영화를 많이 본 덕분에 'Marvel Future Fight'라는 게임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주 사용 캐릭터가 '로키'였다. 로키가 누구인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로키가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좋아서 사용한 건 아니었고, 그 캐릭터가 좋다는 평가가 많아서였다. 원체 게임에 별 재능이 없어 금방 시들해졌고, 그렇게 또 잊혔는데... 얼마 전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에 '북유럽 신화'가 올라왔고, 곧이어 회사 전자도서관에도 이 책이 올라왔다. 그렇게 우연에 우연이 겹쳐져, 이 책을 읽게 됐다.
이 책은 우선, 잘 읽힌다. 익숙한 이름보단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의 글솜씨 덕분이기도, 이야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요소를 추가하고 싶다. 바로 '이미지'와 '익숙함'의 힘이다. 토르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크리스 햄스워스'의 모습이, 로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Marvel Future Fight'에서의 로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을 때 방해가 되는 경우도 많겠지만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우리나라 번역본 3개를 찾아서 읽었었는데, 당시 디카프리오와 캐리 멀리건의 모습이 읽는 내내 떠올랐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 정도만 있으면 이야기를 접할 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도 유사하겠지만,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신들은 모두 인간과 닮아 있다. 무식하고 힘센 토르, 교활하고 약삭빠른 로키, 현명한 크바시르, 아름다운 프레이야 등 인간 군상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다만 신이기에, 그들이 벌이는 일의 내용과 스케일이 다를 따름이다. 거기에 난쟁이와 거인 등 판타지물에 등장하는 여러 주변 등장인물들까지 나와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준다. 우리가 재미있게 봤던 판타지물의 원형이 모두 여기에 담겨 있다.
짧은 시간 여러 신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다 읽고 난 후,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신화는 왜 이렇게 소비되지 않을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아니면 그렇게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서? 받아들일 소비자가 없어서?... 요즘처럼 재미있는 컨텐츠에 목말라있는 시대에, 재미있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신화도 읽히고, 다양한 매체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이야기를 찾는 우리나라의 작가들은 경주에 와서 신라시대의 여러 신화들을 접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우리의 옛이야기들이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왜 우리나라의 신화가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정확한 답은 잘 모르겠다. 그저 어렴풋이 드는 생각은, 우리 선조들이 접했던 이야기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왜 그 이야기를 신성시하고, 때로는 오락거리 삼아 전달했는지 를 알아감으로써 그 당시 어떤 생각과 고민, 삶을 살았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역사를 알아가고 싶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특정 이야기들만은 취사선택하여 내용 자체가 풍부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 점이다.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도 북유럽 신화에 대해 나온 책들이 꽤 많이 있다. 기회가 되면 좀 더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세트 (3권) (안인희 / 2011)
북유럽 신화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 2016)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 (H.A. 거버 / 2015)
북유럽 신화 여행 (최순욱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