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 멈춰 있는 죽음들에 부쳐
뉴스는 그랬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기보단 살만한 사람만 살 수 있는 곳 같다는 괴리감을 투척하는 존재 혹은 누군가의 비극이나 그가 겪어야 했던 참담함을 기삿거리로 둔갑시켜버리는 무심함의 정석 같은 것. 마치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얼굴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얼굴’의 실상이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미명 하에 “대기업 빨래도 해주고 장사도 정치도 하겠다”는 속셈이었다면, 언론사 사주의 공천행 티켓을 위한 포석이었다면, 나아가 미래의 사주가 될 유명 정치인 아들의 특례 채용을 위한 쇼였다면 이야기는 한층 복잡해진다. 흙수저 출신에 '지잡대'라는 꼬리표까지 달린 인턴의 죽음마저도 입맛대로 요리하려는 그 ‘얼굴’엔 애초 인간에 대한 예의나 존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드라마는 이지수의 입을 빌어 “거짓말하지 않고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 기자를 정의해놓고는 오수연의 죽음을 내세워 매일한국이라는 대형 언론사의 실체를 까발린다. 언론사도 결국 기업이며 기업의 본질은 이윤 추구인 탓에 ‘진실을 여는 창’이란 기실 이익에 따라 언제든 얼굴을 달리할 수 있는 유연함임을, 나아가 “왜 때문에?”로 쓰여진 기사는 끝내 ‘킬’ 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뜨겁게 열거해나간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지난 2014년 봄, 배가 가라앉는 참사를 놓고 그 꽃다운 죽음들마저 유린하던 언론사들의 행태가 겹쳐졌기 때문일까. 다행히 극에서는 외면당한 수연의 죽음이 다시금 펜대를 거머쥔 한준혁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오수연 특별법 제정이라는, 것도 만장일치로 가결됐다는, 엔딩을 맺었다. 육개장 컵라면으로 수연의 죽음을 추모했던 장면도 매일한국 사옥을 뒤덮었던, ‘대한민국 언론을 믿지 않겠다’고 적혀있던, 포스트잇들도 이유 모를 위안이 되었다. 픽션에서나마 한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죽음이었기에,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 진실을 말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허쉬’와 함께한 시간들은 ‘위로’였다.
아울러 두서 없는 의문들도 던져주었다. 그렇다면 언론이란 무엇인가. 그들을 무감(無感)한 괴물로 만든 건 누구의 책임인가. 손석희 앵커의 뉴스룸이 없었다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끝내 침몰했을까. 세월호 뉴스를 아직도 하느냐는 질문에 “그것이 제가 현장에 있는 이유다”라고 답했던 당시 JTBC의 신참 기자는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잊지 않겠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한가, 등의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색하거나 작위적인 장면이 없진 않았건만 내공 만렙인 배우들의 연기가 곳곳에서 빛났다. 한준혁(황정민)은 한준혁으로, 캡(유선)은 정말 ‘캡’으로, 허쉬 팀뿐 아니라 공천에서 물 먹은 박명환 사장(김재철)도, 최후의 승자가 된 나성원(손병호)까지도 연기라기엔 진심이 묻어났다. 지수(윤아)의 성장도 눈에 띄었다. 다양한 CG와 완성도를 더한 세심한 연출도, 각각의 장면을 담아낸 OST들도 여운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질문할 차례다.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이들은 누구이며 인간의 죽음조차 존엄할 수 없는 사회는 과연 언제부터 이어져 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