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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May 07. 2021

버려진 생과 마주하기

서로를 구원한 4분, 뮤지컬 ‘포미니츠’


크뤼거(김선영 扮)와 제니(김수하 扮)_국립정동극장


4분으로 충분했다. 거친 서사도, 불친절한 전개도, 음향의 아쉬움도 막판 4분으로 뒤엎는다. 건반과 현과 발구르기의 울림은 주저 없이 내달리는 제니의 손끝과 발끝에서 부딪치고 뒤섞이며 유례없는 음악을 만들어낸다. 슈만의 곡이 제니의 음악이 되는 순간 그녀는 내팽개쳐버린 생을 스스로 구원한다. 버려진 생을 송두리째 건져 올린 4분이었다.
  
물론 꼬일대로 꼬여버린 삶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았다. 피아노에 대한 재능과 여성성(性)은 한낱 학대와 착취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데다 출산의 숭고한 순간조차도 살인자라는 누명에 의해 철저히 배척당했기에. 배 속 아기에게 ‘오스카’라고 불러줄 세상마저도 제니에게는 허락치 않았기에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버리고 벌한다. 새끼 잃은 짐승의 야성만이 그녀의 삶을 위태롭게 지탱할 뿐이다.


삶을 연명해온 건 크뤼거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이(한나)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도태되기를 선택한 그녀의 고집스러움은 제니의 ‘야성’과 다를 바 없다. 속죄의 마음으로 재소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왔지만 그녀를 용서해 줄 이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그토록 혐오해온 ‘그녀 자신’ 뿐이기에. 그녀 또한 자신이 만든 지옥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그랬기에 그들은 단번에 서로를 알아본 건 아니었을까. 추모 예배에서 울려 퍼지던 모차르트의 선율에 귀를 기울이던 단 두 사람. 종이를 껌처럼 질겅이던 그녀들. 한나와 오스카라는, 가슴 깊숙이 묻어놓았던 이름들을 꺼내게 한 존재들. 아마도 그들은 어느 영화 속 말처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은 서로였는지 모르겠다.


피아노의 중량감이 돋보이는 미니멀한 무대와 조명_국립정동극장


그래서일까. 마지막 4분의 연주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들은 인생의 이 ‘4분’과 마주하기 위해 지금껏 살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반을 내리치고 현을 뜯고 발을 구르며 다만 ‘나’와 맞서 싸우기 위해, ‘나’로 살아가기 위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연주하고 또 연주해야 했던 건 아닐까. 이 4분만큼은 오롯이 ‘나의 것(Das Ist Meins)’이므로.


크뤼거는 알았을 것이다. 그 4분이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 유일한 시간이라는 것을, 죽어 지내던 자를 산 자로 되돌릴 마지막 시간임을 말이다. 크뤼거에게 제니 폰 뢰벤이 ‘제니’가 된 순간 그들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었고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며 수렁에 빠진 서로의 삶을 구원했다. 때론 모차르트와 슈만의 피아노로, 때론 힙합과 재즈의 연주로, 와인을 들이키며, 숙녀의 인사로 예를 갖추며. 수갑은 채워질지언정 그러나, 그럼에도, 서로의 문은 열어 놓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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