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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스름빛 Jan 12. 2017

여기, 지금, 아직 희망이 있다

[서평] 도종환의 <사월 바다>

*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omn.kr/m30h 


도종환 선생님(존경하는 분들을 언급할 때 반드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을 두 번 뵈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을 따라 '홍명희 문학제'에 갔을 때와 2009년 '한국작가회의'에서 주최한 '젊은 작가와의 대화 -김사이 시인' 에서 였다. 홍명희 문학제 땐 아주 잠시 뵈었다. 내 앞을 먼저 걸어가던 선생님이 문을 여시곤 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주신 기억이 오래 남았었다. 나보다 앞서 홍명희 문학제에 참석했던 선후배들이 도종환 선생님을 뵙고는 친절하시고 인자하신 분이라는 평가를 했었는데 나도 그 말에 공감을 하게 되었었다.


2009년에는 길게 뵈었다. 당시 도종환 선생님은 '한국작가회의'의 간사셨다. 용기를 내어 따라간 뒷풀이 자리에서 여러 명의 작가들과 함께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역시 도종환 선생님은 따뜻하시고 유쾌하신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선생님이 정치인이 되다니. 여전히 놀랍다. 하지만 어느 일면 이해도 된다. 세상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정치를 바꾸어야 하니까.


인간적으로야 도종환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선생님의 시를 많이 좋아하진 않았었다. 시의 매력은 역시 은유와 상징, 멋들어진 언어에 있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송경동 시인처럼 도종환 선생님의 몇몇 시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오늘 하루>라는 시는 자주 읽는 시들 중 하나다.


며칠 전, 선생님이 시집을 내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외였다. 정치를 하시는 선생님이 시집을 내시다니. 『사월 바다』를 산 이유는 시인이자 교사이던 시절의 선생님의 시 경향과 정치인이 된 후의 선생님의 시 경향이 달라졌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의 말부터 읽었고, 언제나 그렇듯 작가의 말에 반했다. 왜 하필 정치를 택했을까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골집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거기 수련 한 포기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련에게 왜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존재의 바탕이요 수련의 현실이며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왜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느냐고 묻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 아닐까요.

 아비규환의 현실, 고통과 절규와 슬픔과 궁핍과 몸부림의 현실.

 그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찍으려면 몸에 흙이 묻습니다. 집을 고쳐 지으려면 흙먼지를 뒤짚어쓰게 됩니다. 지난 사년간 온몸에 흙을 묻히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 시들을 썼습니다.


 구도의 길과 세속의 길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을 통해 가고자 하는 길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 2016년 10월 도종환"



사람들의 우문에, 이보다 명쾌하고 현명한 대답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런 대답을 듣고 있노라니, 정치인으로서 선생님의 시가 달라졌을까 싶었던 생각도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랬듯, 『사월 바다』의 시들도 정직하고 분명했지만 깊었다.


슬픔의 통로


별들이 유난히 가까이 내려오는 밤이 있다

그믐이 다가올수록 어둠은 더 많은 별을 내보낸다

동굴 속에서 몇날 며칠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킨

한 사내를 생각한다 불씨를 만든 것은

얼어터진 두 손이었을까 혹독한 한파였을까

삼나무를 쪼개 배를 만들게 한 것은 거친 물결

지도를 만든 것은 오랜 방황과 잃어버린 발자국

기도를 알게 한 것은 고통이 아니었을까

사랑을 가르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경전을 쓰게 한 것은 해결할 길 없는 고뇌

시인을 만든 것은 열망이 아니라 슬픔 아니었을까

이 통증의 끝에는 어제와 다른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삶과 죽음이 완만한 속도로 임무를 교대하듯

슬픔 속에서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시간이 오리라

지금은 다만 천천히 깊은 슬픔의 통로를 걸어나갈 것

서둘러 눈물을 닦지 말고 흐르게 둘 것

여기까지 우리를 밀고 온 것이 좌절의 힘이었듯

약초를 알게 한 것이 상처와 고통이었듯

패배를 딛고 처절하게 한발 한발 걸어나갈 것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다스려 온기로 바꿀 것

지금은 따뜻한 위로의 물 한잔을 건넬 시간

남을 찌르지 말고 피 묻은 분노의 칼을 거둘 것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마음의 안부를 물어볼 것

그리고 창을 열 것

그러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만나게 되리니

그쪽으로 갈 것

그러면 신도 우리 옆에서 그쪽으로 함께 가시리니


"시인을 만든 것은 슬픔"이었을지 몰라도 "통증의 끝에 어제와 다른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니 "좌절의 힘"은 "한발 한발 걸어나갈" "온기"이자 "위로"가 되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쪽으로" 가면 "신도 우리 옆에서 그쪽으로 함께" 간다. "슬픔의 통로"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 되어 우리뿐만 아니라 신도 안내한다. 그러니 섣불리 절망하지 말 것.


정치인으로서 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어도 희망을 놓치 않는 시인의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현실이 암울해도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 시는 현실의 어두움에 오래 좌절했었던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뿐이 아니다.


희망의 이유


떡갈나무 잎을 들추고 도토리를 파묻는

다람쥐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라

그대도 나도 가을까지 왔다

숲의 정강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기계톱의 질주에

우리의 안락한 정원이 있다고 믿지 말라

우리의 미래는

불에 탄 나무에서 다시 솟는 연둣빛 새순

하늘 꼭대기에서 거기까지

햇살의 화살 한개를 쏘고 있는

태양의 따스한 손길에 있다

국경을 넘어와 땅속 깊이 감춰진 벽을 뚫어버리는

가공할 폭탄의 힘에 한 시대의 가능성을 걸지 말라

밤의 거리에서 평화를 구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촛불과

그 불을 받쳐든 어린 두 손에 희망이 있다

이웃나라를 손쉽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부러워하지 말라

만년을 녹지 않는 히말라야 숫눈처럼

빛나는 순백의 영혼

오체투지로 낮아지고 가난해져서

다시 일어서는 정신에

영원한 미래의 날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잔인하게 쓰러뜨린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

승리의 포만감으로 가득한 식탁과 살찐 육신은

우리가 죽이고 짓밟은 것들의 묘지를 이루고 있나니

오래오래 주류로 살아온 이들이 잘 차려놓은

화려한 연회장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고 손가락질하는 소수가

소박하고 정결하게 차린 두레반에 미래가 있다

어미 잃은 어린 짐승을 감싸안으며 눈물겨워하는

모성과 연민과 자비 아니면 희망 아니다

새 한마리의 목숨과 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도 그대는 일주문 밖이다

속도와 경쟁과 승리의 갈망에 휘둘리지 말고

그만 내려서라

댓잎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의 속도

낙화 이후의 긴긴 날을 걸어가는

꽃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면

그대가 달려가는 속도의 끝은 반드시 벼랑이다

증오의 말을 가르치지 말라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경전 같은 말들이 있음을 가르치되

시인의 음성으로 하라

나약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은 목소리로

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라

거기 희망이 있다 그들이 희망이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 오래도록 희망이다

  

이 시는 『사월 바다』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도종환 선생님의 가치관을 깨닫는다. 선생님이 끝까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의 음성"으로 "새 한마리의 목숨"과 "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고 말하는 혜안을 가졌기 때문이겠다.


『사월 바다』를 읽으며 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한다. 그동안 도종환 선생님의 시를 폄하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한다. 시의 힘은 문재(文才)가 없는 범인(凡人)은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빼어난 언어적 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손을 잡고 나아갈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의지에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점검한다. 어둠이 짙게 깔린 여기, 지금,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음성이야말로 시가 아닐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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