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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스름빛 Oct 13. 2017

공부할 권리를 찾아서

- 정여울의 <공부할 권리>를 읽고

                                                                                                                            

<공부할 권리>를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자주 밑줄을 쳤다. 앞서 말했듯, 이런 글을 쓰고 싶다. 몇몇 부분은 오글거릴 만큼 다정하여 조금 불편했지만 읊조리듯 쓰여진 문체도 대체로 마음에 든다.

왜 나는 이 글에 이토록 감정이입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을 '에필로그'에서 찾았다. 


'공부, 나의 존엄을 지켜 주는 최고의 멘토'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글은 제목부터 내 얘기 같았다. 이 글의 서두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 본 적은 없으므로 앞으로도 '그럴듯한 프로필'은 가지지 못하겠지만, 넷째 줄 이후는 공감을 많이 했다.


"하지만 프로필에 이런 내용을 쓸 수는 없겠지요? 저를 이룬 팔 할의 감성은 삐딱함과 서글픔과 왕따의 공포였다는 것을. <중략> 제 프로필에는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낀 절망감, 오랫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느낀 모든 좌절감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일을 쉰 적은 없지만, 겉으로는 '문학평론가'라는 정체성을 고수했지만, 사실은 늘 불안했지요. 늘 일은 했지만 어디에도 소속된 적이 없으니, 저는 항상 허공에 매달린 덧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쓸쓸함의 밑바닥에는 '공부로는 취직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343쪽)


문학평론가는 아니지만, 기간제 교사였던 나는 "오랫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느낀 모든 좌절감"과 "어디에도 소속된 적이 없"어 "허공에 매달린 덧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의 의미를 안다. 그녀가 느꼈을 "불안"이 무엇인지도 안다. 그런 감정이 정여울과 정확히 일치할 리 없겠지만, '사이'에 서 있어 느끼는 공포감과 불안의 정체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를 이룬 감성 또한 "삐딱함과 서글픔과 왕따의 공포"였을 것이다. 그런 감성 속에서 유일한 희망은 '공부'였다. 이 '공부' 앞엔 '입시를 위한'이란 수식어(구)는 붙지 않는다. '살면서 생기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혹은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혹은 '나답게 살기 위한'이란 수식어(구)가 붙을 뿐이다.


정여울이 "딴 생각"이라 표현하던 생각이 "진짜 고민이자 인문학의 화두임을 알게 되었"듯 나 역시 무수한 "딴 생각"들을 따라가는 것이 '공부'였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지만 나에겐 가장 절실한 고민들. 그런 딴 생각들은 자본으로 가늠할 수 없는 가치다. 즉, 실용적이지도 효용적이지도 않다. 그저 또다른 무수한 질문들을 양산해낼 뿐이다. 


그러므로 "인문학 공부의 무서운 맨얼굴은 파고들수록 '넌 지독한 무식쟁이야!'라는 것을 기쁘게 깨닫게 해 준다."(345쪽)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할 뿐이며 그 과정을 거치며 "진짜 배움"에 가까워질 뿐이다.


정여울과 달리 심리학보다는 사회학에 더 많은 지분을 두고 나를 탐구했지만 결론은 같다. "당신이 '공부할 권리'를 스스로 되찾는 순간, 새로운 인생의 2막이 비로소 활짝 열릴 것"(348쪽)이라는.


슬프게도 정여울과 달리 (현재는) 그 어떤 직함도 붙일 수 없는 스스로가 어느 일면 부끄럽고, 어느 일면 좌절스럽지만 여전히 공부만이 살 길이라는 모토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 스스로 존엄하고자 해도... 여전히 타인의 목소리는 들린다. 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내 멋대로 짐작하는 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내가 '자본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노동을 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모토가 바뀔 리 없고 지향점이 사라질 리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대안을 모색해가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겠다.


읽는 중이라며 정여울의 글을 몇 대목 옮겨두었지만 이어 읽으며 옮기고 싶은 대목들도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나 에필로그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몇 대목만 옮겨둔다. 


"손택은 우리가 멈춰야 할 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며 되찾아야 할 것은 타인을 향한 공감임을 일깨우지요. 연민은 아픈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안방의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며 ARS로 3,000원 기부하는 아늑한 자기만족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공감은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는 그 자리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의 시작이며, 타인의 고통을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힘으로 단련시키는 삶의 기술입니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입니다."(133쪽, <작가의 탄생> 중에서)


"분노는 폭력과 테러, 살인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정의 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감정입니다. 부당함에 대한 영혼의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중추가 망가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분노에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분노에는 사회를 파괴하는 에너지가 있지만, 동시에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에너지도 있지요. 인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회를 파괴시키는 에너지로서의 분노'가 아니라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분노, 그러니까 '정의로운 분노'에 대한 공감대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중략> 정의를 위한 분노, 공동체의 더 나은 삶을 향한 지혜로운 분노만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229쪽, <분노할 권리> 중에서)


"더 많은 돈과 더 큰 집과 더 멋진 스위트홈을 이루는 것이 현대인의 이상이 되었지만, 그것을 꿈꾸는 이상 자체가 '커다란 감옥'일 수 있음을 마르크스는 일찍이 간파합니다. 시민혁명은 분명 자유를 얻게 해 주었지만 그 자유의 본질은 '돈을 벌어야만 얻는 자유'였음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 사상은 유효기간이 다했다는 푸념의 정체는 정말 마르크스가 쓸모없다는 뜻일까요? 오히려 마르크스를 읽고 공감하는 순간 '세상의 대세'를 따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아닐까요? 마르크스와 제대로 만나기 전에 느끼는 '교육된' 공포는 잠시 접어 두고, 마르크스에 대한 온갖 편견과 소문의 더께를 걷어 낸 채 마르크스 그 자체와 만나는 순수한 기쁨을 다시 느낄 때입니다. 


마르크스와 앵겔스, 두 젊은이의 천재성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세계는 만지도 다듬고 고칠 수 있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꿈꾸기는커녕 이 세상은 무서운 곳이라고, 세상 자체가 온갖 적들이 가득한 전쟁터라고 배웁니다. 세상 속으로 직접 뛰어들기도 전에 세상에 대한 비관론을 주입당하고 있지요."(298쪽, <혁명의 꿈> 중에서) 


앞으로도 나는 '공부할 권리'를 누리며 살고 싶다. 자본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들만이 나를 또 우리를 억압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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