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몰고 온 것의 정체
2019년 4월의 기록
글을 쓸 수 없었다. 매일 아무런 글이나 쓰자고 마음 먹었던 것을 하루 이틀 미루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마감기한이 있는 글들을 쓰는 일에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하루에 200자 정도 적으면 되는 작은 일기장에 한줄 채워넣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그 상태를 자각했을 때에는 쓰기는 커녕 읽는 것조차 어려워져 있었다. 읽을 수가 없다니. 지적 활동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분이 영영 은퇴 선언을 한 것만 같았다. 가볍고 몰입하기 좋은 소설이나 만화 외의 텍스트를 길게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추상적 사고 역시 불가능했다. 지적 기능의 할당량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미 소진해버린 게 아닐까? 그런 공포에 시달렸다. 나는 아직 창창하게 젊었고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탁월하지는 않더라도 그럭저럭 지적 활동을 해내던 뇌가 이대로 영영 멈춰 버린다면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그 공포가 우울감이 상승해 도움이 되지 않는 ADHD 약을 꾸역꾸역 먹으며 억지로 각성상태에 머무르도록 부추겼다. 지금은 각성이 아니라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 그런 단순한 진단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몇 주간 이어졌다.
유학생들 사이에서 도는 3, 6, 9 법칙이라는 게 있다. 처음 유학을 오고 나면 3개월, 6개월, 9개월 차마다 돌아가고 싶은 강력한 욕망에 휩싸이고 타지 생활이 유독 괴롭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9개월 차가 지나고 나면 3년, 6년, 9년 차에 다시 같은 문제가 생긴다. 2019년에 들어서면서 나는 프랑스 유학 4년차를 넘어섰는데, 바로 그 1월에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만성 우울증 환자로서 이런 주기 법칙이 의미가 없이 '나는 좀 항상 힘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프랑스에 존재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특히 몹시도 괴로웠다. 꼭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나로 존재하는 것으로 부터.
마침 한국에서 짧은 방학을 보내려고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던 참이라 한국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긴장이 풀린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HP가 바닥난 것처럼 매 순간순간 그냥 힘이 들었고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고 구토감이 올라오거나 실제로 토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거나. 그리고 너무나도 편안했다. 가족들은 대가 없이 나를 보살펴주었고 친구들과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십년 전 이야기를 어제일 처럼 떠들었다. 엄마 아빠는 끼니 때마다 한상 가득 밥을 차려주었고 아빠는 퇴근할 때마다 나를 껴안아줬다. 엄마는 주섬주섬 내가 좋아하는 두유나 간식 같은 것들을 잔뜩 미리 주문해놓았다. 그 기꺼운 감정에 영영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너무나 기뻤고, 몇 개월만에 완전히 안전한 곳을 찾은 듯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돌아오기 전날 끔찍할 정도로 프랑스에 돌아가기 싫어서 새벽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펑펑 흘렸다. 강박증에 도움이 된다며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이 추가해주신 약을 먹고 겨우 진정해 비행기에 올랐다.
어떤 유명인사는 두려워 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만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일은 없다고 했다. 항상 그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 프랑스에 돌아왔을 때 만큼은 그 말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여전히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고 능숙하게 공항에서 호텔로, 호텔에서 기차역으로, 기차역에서 집으로 움직였다. 폭탄 맞은 것처럼 어질러놓고 떠났던 방을 청소하고 한국에서 한 가득 이고 온 짐을 제자리에 채워넣었다. 아주 조금씩 밀린 일기를 쓰고, 아주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요가를 하러갔더니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거뜬하게 해내던 아쉬탕가 시퀀스가 20분 정도 진행됐을 때 다리가 후들거렸다. 체중이 자꾸만 줄어들었다. 그새 말랑해진 근육들 때문에 여기저기 몸이 쑤시는 게 느껴졌다. 그때서야 지적 기능이 확연히 떨어진 뇌에 대해서 같은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지치고 쉬던 근육들을 되돌리기 위해서 천천히 다시 시작해야 하듯이 지적 활동을 위해서도 재활하듯 차근차근 단계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고작 열흘 남짓한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고 돌아왔더니 훌쩍 길어진 프랑스의 해도 한몫 했다. 원래 계절성 우울증을 앓는데 해가 극단적으로 짧아지는 프랑스의 가을 겨울은 내게 유난히 혹독한 편이다. 게다가 지난 학기엔 ADHD 약도 없이 어떻게든 학교 수업을 주먹구구식으로 따라가려다가 번아웃이 와 나가 떨어진 상태였다. 마침 새 약이 잘 듣기 시작했고 ADHD 치료도 다시 시작한 데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겨울이 결국 끝나듯이 봄도, 여름도 결국 끝날 것이고 겨울은 다시 돌아오고야 말텐데 이런 것에 영향받는 게 싫으면서도 당장 아침에 파랗게 해가 뜬 하늘을 보면 안심이 됐다. 그리고 지금, 나는 거의 10개월만에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책을 몇 권 읽었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운동을 하고 있다. 식욕이 없어도 꼬박꼬박 밥을 먹고, 일어나면 옷을 갈아입고 침대를 정리한다. 조금씩 비판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다. 오늘은 전에 읽었던 책의 인상깊은 구절들을 아카이브하고, 베스트셀러라는 책을 읽고는 한바탕 욕을 쏟아냈다. 큰 발전은 아니지만, 모두 올해 초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일들이다.
2019년을 맞이하고 지난 3개월 동안 나는 어떤 상태였는가. 외출을 할 수 없었다. 재정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어서 친척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