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작가가 됐나?
대단히 비대해진 자의식의 발로로 적은 제목이다.
(+ pm 12:26 그리고 제목과 소제목을 이어 읽으면 비문이었다.)
브런치 어플은 띄엄띄엄 '작가님의 글을 보고 싶어요' 라든지 꾸준히 적어간 글로 데뷔를 할 수 있다든지 하는 응원이나 자극을 제공한다. 얼마 전엔 60일째 작가님의 글이 올라오지 않고... 그런 알람이 왔는데, 젠장, 선인세 받고 사인했던 계약까지 물러 가며 일 못하겠습니다 하고 드러 누워있던 내게 퍽이나 긍정적인 메시지였겠다.
이미 데뷔를 했고 내 소설이 출판 시장에 나왔다. 또 다른 소설이 다른 플랫폼에서 공개될 예정이고, 또 다른 소설이.... '글근육'이라는 말을 쓰는데, 꾸준히 하루에 얼만큼의 글을 쓰지 않으면 근손실이 오듯이 글을 쓰는 일도 어색해진다는 비유에서 온 단어다. 만 1년이 조금 넘게 '픽션 근육'을 타이트하게 단련한 시간이었다. 위에 나열한 이 핫하고 가난한 출판 업계와의 인연을 보면 그럭저럭 평도 좋았단 의미이리라.
와, 그런데 소설 원고들은 다시 볼 때마다 이것보다 더 잘 써야했고 더 잘 쓸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 때문에 밀린 일더미 위로 또 일이 쌓이는 기분이라 너무 힘들거든? 어째서 거의 한 번도 돈받고 쓴 적 없는 에세이들, 이 블로그와 어딘가에 산발적으로 적어둔 논픽션 소회들은 몇 년쯤 지나 봐도 대단히 뛰어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몇 년이 지나고도 노력하지 않고 슥 스마트폰 액정 몇 번만 넘기면 되는 곳들에 널려 있을 만큼 논-픽션 글들은 많이 써댔고, 픽션 글은 그만큼 쌓이려면 아직 숙련도가 부족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얼마전 청탁을 받아 쓴 논-픽션 원고를 읽은 소설 작가 친구는 내게 '야 이건 반칙이다, 사람의 감정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 픽션 작가의 수법으로 이런 절절한 에세이를 쓰냐'는 칭찬 겸 힐난을 던졌다. 아직도 잘 모르겠는게, 픽션을 쓰기 전에도 대충 글이라면 그런 식으로 썼던 것 같다. 차이라면 내가 진실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들을 전달하기 위해 픽션 속 세계에서는 인물부터 관계와 갈등과 그야말로 세계-관을 직조해내야 하는 돌아가는 이야기고, 에세이는 언제나 분명하고 절실하게 쏟아낼 뿐이라는 정도일 것이다.
소설은 좀 더 취향을 가리고 독자 또한 픽션은 읽는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의 누구에게나 에세이든 무엇이든 글을 쓰면 스팸 메시지처럼 파일을 툭툭 던져가며 좀 읽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친구들도 대폭 줄어들었다. 반대로 소설이 아닌 나의 글은 대부분 취향을 가리지 않고 대다수의 친구들이 잘 읽어주었고 좋아해주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봐도, 아니 당장 이 포스트만 해도 몇년 전 한참 우울을 파고 들어가 또아리를 틀고 썼던 글을 보고 어이가 없어 적기 시작했다.
"나와 보낸 시간을 쌉싸름하고 몽환스럽게 적어내는 그들의 글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잠이 들고도 통화를 끊지 않고 숨소리를 교환하던 나만 어여삐 여기면 될 뿐 굳이 몰이해의 폭력을 포장하고 대상삼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만들어낸 덩어리에 스스로를 비추느니 어떤 이름 아래의 관계에서 단 한번도 나로서 이해받고 사랑받은 적 없음을 외로워하는 것이 더 떳떳하다."
미쳤니...? 어떻게 이런 글을? 천재세요? 이게 나야? 너무 당황스러워서, 또 강한 에고로 꽁꽁 감싸 굴종의 그리움보다는 떳떳한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수면약을 땡겨 먹은 인과로 닥친 불면을 박차고 일어나 이 포스트를 적기 시작했다. 기왕 언젠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글로 벌어 먹고 싶다고 생각했더라면 왜 나는 에세이스트가 아니라 제 성에도 매번 차지 않는 소설로 길을 틀었는가?
아마 이 에세이 류의 글들은 좀 더 계시적으로, 산발적으로 구역감에 가깝게 튀어나오는 감정들을 연료로 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들을 잘 모으고 정리하고 또 구술하고 다시 적고 곱씹다 나온 아주아주 단순하고도 명료한 몇 줄 짜리 결론이 테마가 되어서 소설의 구상이 되고는 한다. 그리고 수십 년 묵은 비법 소스처럼 내 안에서 깊게 안착한 테마로 긴 호흡의 소설을 쓰는 방식이 내가 매일(최대한 그러려고 노력하면서), 꾸준히, 즐겁게... 그리고 나를 이 숨막히는 주제들로부터 완전히 소모해버리지 않으면서도 글을 쓸 수 있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정하고 한계가 없는 듯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상냥한 세계를 사랑해서 특히 장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내 소설들을 모아놓고 보면 음... 가관이다. 세상에 할 말 아주 많고 화가 잔뜩 나서는 버르장머리없고 비열하며 몰지각한 놈들을 골려먹을 궁리만 한 사람이 쓴 글 같다. 그래서 재미는 있다. 일단 나한텐.
하지만 그렇잖아, 현실은 우리에게 다정하기만 한 면모를 보여주지 않고- 그러기는커녕 매번 아주 엿같이 굴 때가 너무 많다. 화도 안내고 어떻게 버텨?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엉엉 울고 저주한 다음 푹 잠들어서 하루를 통째로 날려먹고, 푸지게 건강하지 않고 자극적인 음식을 씩씩 삼키고 나면, 그제서야 남들의 시시콜콜하지만 절실한 이야기를 읽고 참견하며 다정할 힘도 생기는 법이다. 나는 후자로 베풀고 베품을 받는 관계가 주로 (당연히) 편안하고 사랑스럽지만, 욕하고 저주하는 데도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탓에.
아직 작가로서 나의 세계를 잘 모르겠다는 어렴풋한 감각 속에서 사정없이 근손실을 앓은 픽션근육을 재활하면서, 이 재능으로(좀 견뎌 보세요, 잘 모르는 구독자 여러분.) 에세이스트가 아니라 픽션을 쓰겠다고 끙끙대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결국 소화해낸 다음에 씩씩 일어나 적어내는 이야기를 더 잘하고 싶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굳이 문학, 그리고 비문학... 같은 구분 사이의 우열같은 걸 내려는 건 아니다.
엄청나게 말이 많고 할 말도 많고 말을 잘하는 나라는 이야기꾼에게 이 이야기 방식들을 구분지으면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나 좀 돌아봐야 했을 뿐이다. 꼬박 하루 동안 보통 사람들은 아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고 많은 말을 듣고 읽어내는 나는, 가끔은 이런 정리의 순간에 조차 끝없이 출력으로 말하고 써대는 게 가장 효율적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거봐. 인세 시장의 피눈물을 알고도 돈 한 푼 안 떨어질 브런치에 또 제 발로 기어들어와 시시콜콜 뭐라고 적어대고 있다고.
내일도, 아니 곧 해가 뜰 오늘도(검열 처리할 비속어) 씩씩하게 뭐라고 종알댈 거잖아.
근데 에세이 쓰는 거 너무 재미있다. 꼭 돈 받으면 돈 안 되는 글쓰기는 또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브런치를 보고 출간 제의가 오지 않기를 바라주시면 제가 좀 더 자주 글을 쓰러 올 것 같은 청개구리 마음. 아시나요? 그러니까 원고 독촉하듯 알람은 그만 보내줘. 적어도 다음 60일 동안은. 안녕.
"내가 살아 있는 게 그대들에게 다행인 만큼 그대들도 나에게." 이렇게 신년 인사를 적은 적이 있더라고요. 살아남느라 다들 고생 많지, 어떡해 계속 살자, 하면서. 진짜 고생 많죠, 어떡해요, 그냥 얼레벌레 우왕좌왕 대충 그래도 살아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