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한을 남기는 건 정말 좋지 않다
이 블로그에서 조회수나 반응이 가장 핫한 포스트는, 거기에도 써 있는 것처럼 내가 쓴 글이 아니다. '낙태'가 죄였을 무렵 국제 인권단체에서 한국과 비슷한 정책을 취하는 국가에서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을 위해 소정의 가격 혹은 사정에 따라 더 편의를 배려해 보내주는 약물을 통해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했을 때 써서 전달한 내용을 내 블로그에 게시한 거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상황과, 글에 비해 달라진 것들을 살펴보는 일도 의미가 있겠지만 일단은 내가 직접 쓴 글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다음은 아마 '프랑스에서 동양인 여자로 살아남기' 라는 제목으로 적은 인종차별에 대한 포스트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나는 심상정을 지지한다'는 제목으로 쓴 포스트다. 대선 정국에 들어설 때쯤, 혹은 좀 더 직전에 그 글을 다시 읽어보니 참 투박하더라. 당시에는 프랑스에서 지내고 있었고 재외국민 선거를 위해 왕복 600km 기차를 타고 파리 주불 한국 대사관에 가서 투표를 했다. 그 직전 쯤, 당시 심상정 대선 후보의 토론회에서 '그 발언'이 있었다. 그때 심상정 후보에게 그나마 의지할 수 있다거나 고맙다거나 그런 마음보다도, 내 감정의 가장 큰 비중은 현 정권 수장인 당시 유력 대선 후보 문재인에 대한 분노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를 분노에서 멈출 수 있게 해준 것이 심상정 후보였다. 그래서 심상정 후보를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적어야 했다. 지금 이 글도 다른 글을, 마감을 지켜서 꼬박꼬박 비축하고 쌓아둬야하는 가상 세계의 이야기를 적기 위해서는 명치께에 꽉 막힌 이 참담한 마음을 좀 토해야 하기 때문에 적는 것처럼 그때도 명치를 메운 분노와 분노에서 멈춰져서 안도해야 하는 씁쓸함까지 토해내지 않으면 숨이 터질 것 같지가 않았다. 동성애,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대합니다. 그런 말에 턱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고 뱃속이 마구 뒤엉킬 때, 대선 후보로서 가장 중요한 발언 시간을 써서 그 말이 틀렸으며, 상처받을 성소수자들을 언급한 심상정이 있었기 때문에 나와 우리는 거기서... 그러니까, 사상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와 수구 정권을 몰아내고 국가를 정상으로 돌리자면서 본래는 겨울에 열리던 대통령 선거가 봄으로 당겨졌을 때 말이다. 그때 우리는 비정상적이고 국민을 대변하겠다 자청한 사람들 사이에서 '싫은 것'이 되며 배척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날 그 주제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를 심상정이 모두 가져갔음은 물론이고 논의가 거기서 끝나게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상정 후보만이 그날의 토론회가 이 나라의 현대사에 새겨질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서도 기로에 선 대선 토론회 현장이 그저 대선 후보들의 입씨름 현장만이 아니라, 이 나라 국민들에게 나라의 정책과 행정을 대변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 무엇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나라의 굵직한 결정에 영향을 미칠 그 정치권의 가장 선두주자들이 모인 현장에서 차별과 배제와 혐오의 언설로 이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칠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길 바라준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문재인에게 분노한다, 문재인 때문에 절망했다, 말고 심상정을 지지한다, 라고 애써 말할 수 있었다.
나의 분노는 그 후 오년 동안에도 덧대어지고 해묵어 쌓여만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상정과 정의당의 장혜영이, 그리고 민주당의 몇몇 여성 의원들이 그나마 나를 대변해준다고 위안을 느꼈다. 정치인에게 온 마음을 담아 응원과 지지의 메시지를 적고 후원금을 보내고, 왜냐하면 나의 분노가 절망과 패배의식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지탱한 마지막 안전띠 같아서.
이번 대선에서 가장 화가 난 것은, 너무나 과대대표된 2030대의 극단적인 여성혐오자들, 극우세력 남자들만이 청년이고 설득할 유권자인 것처럼 '이대남'을 호명해댄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권을 제대로 심판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대남 호명질, 화난다. 박근혜 정부의 탄핵 정국이 이화여대에서 촉발됐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기만적이고 무례했다. 뒤늦게야 속성 과외로 페미니즘을 외친 이재명 후보, 그리고 그야말로 그 이재명 후보에게 그 길을 멱살잡고 따라오게 한 박지현 위원장과 권인숙 의원이 이루어낸 성과를 두고 '여러분은 이제 시작' 운운하며 2030 여성들을 칭찬하는 기성 정치인들은 역겹기가 짝이 없다. 2030 여성들이 무슨, 자연발생해서 갑자기 허공에서 뚝 떨어졌나?
여성들은, 그리고 울며 겨자먹기로 1번을 뽑거나 두렵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도 타협할 수 없는 가치 때문에 다른 좌파 후보들을 선택한 여성과 퀴어들은 언제나 목소리를 높여 정치적 요구를 했고 묵살당했다. 손가락 놀음 따위의 불링에만 마이크를 가져다대주고 정당하게 들어줄 가치가 있는 것처럼 과잉대표를 방기하고 부추긴 것도 당신들이었다. 이번에 당선된 검찰 출신 극우 후보와 캠프에서 매번 추악한 여성혐오 발언을 일삼을 때마다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야 혹시 모르는 새에 우리는 투표권 박탈당했냐?;'
그 동안에 그렇지 않다고 느끼게 해준 후보가 이번에도 심상정이었다. 유력 후보 대선 토론회에서 또다시 발언 기회를 무엇보다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준 것도 심상정이었다. 공정하게 말해서 이번엔 상처를 많이 받을 정도로 뉴스를 열심히 살펴 보지는 않았다. 정치 뉴스에는 이제 정말 신물이 났다. 촛불 정권으로 봄에 급하게 치루어진 대선으로 뽑힌 대통령이 나오고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는데 임신 중단 법제화나 차별 금지법 제정이나 생활동반자법? 지독하게 혐오적인 군형법 개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오년 동안에도 너무 많은 여자와 퀴어 동지들을 잃었다. 그들은 이번 대선에 투표하지 못했다. 죽어버려서. 세월호가 어째서 침몰했는지 아직도 모른다.
정치에 신물이 났다. 그래도 투표를 해야겠는데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한계가 닥칠 때까지 최대한 흐린 눈으로 못 본 셈칠 때에도 혐오발언이 넘치는 와중에 정당한 말을 하는 건 이번에도, 또, 심상정 후보 밖에 없었다.
정치인을 친근하게 이웃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다보면 까딱 잘못해선 팬덤 정치에 휘말리고 이제 그놈의 팬덤 정치, 우상 정치는 진절머리가 나니까 우리 못지 않게 지칠만도 했을 심상정 후보의 심정에 대해 알 것 같아도 좀 거리를 두고 지냈다. 이 세상에 그 반면교사가 되어줄 만한 또라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렵지도 않더라고.
그런데 심상정을 뽑을 수가 없었다. 이 글의 반전 포인트가 있다면 여기다. 내가 그 가슴을 치면서 심상정 후원회에 계속 얼마씩 입금을 하고 1번을 찍고 나온 2030 여성이다. 돈 얼마가 아니라 그냥 한 표를 찍고 싶었다. 이 추접스러웠던 대선 정국에서 (뭐, 다시 공정하게 말하자면 백신 관련 이슈에서는 심상정 후보의 의견에 꼭 동의하지는 않았다)유일하게 오롯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저 개저씨들과 개자식들 앞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해준 단 한 명이기 때문에 나를 대변할 후보는 당신 밖에 없었다는 표현으로 그 한 표가 그렇게 아쉬웠다. 그 한 표를, 추적단 불꽃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를 위해 캠프 합류를 결정한 박지현 후보에 대한 애타는 연대감으로 그리고 이 혐오 표장사는 틀렸고 진짜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필사적인 '살고 싶다'로 써야 했다는 게 가장 비통하다. 그 비통한 한 표를 이제야 알아채는 놈들에게도 화가 나고 그 비통한 여자들의 표가 이렇게나 모였는데도 그저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 여자들 더 엿되어 보라고 계급의식도 뭣도 없는 머저리들이 머릿수로 짓뭉갠게 열받는다. (부동산 얘기하지 마라, 그딴 천박하고 한 놈도 앞 뒤 맞게 얘기할 줄 모르는 광기에 찬 욕망 때문에 정권이 결정됐다고 나한테 가르치면 본인 기분이라도 나아지시나? 안 궁금하니까.)
이따위로 대선을 치뤄놓고 모두가 멘탈을 추스리려고 애를 쓰다가도 '아니 근데 씨발'을 외치는 동안 또 청와대 이름으로 성범죄자 전 지자체장에게 조화를 보낸 문재인 정권에게 환멸이 난다. 성소수자 이슈를 논할 가치는 있냐고 하는 놈을 비대위원장으로 거론하는 민주당에게 화낼 기력도 안 난다.
이 드럽게 파란만장한 정치와 근현대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라고 대충 여기서 연결감을 느낄 동지들의 역사는 매번 최악이 닥치고 닥쳐도 어떻게 버티고 또 찔끔 이겨낸 역사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역병이 종식되면 언제고 우리는 다시 광장으로 나서서 프라이드 행진을 할 것이고 노동운동에 연대할 것이고 불매운동도 할 거고.... 하지만 지난 오년을 생각한다. 그 전의 두 정권까지 갈 것도 없이 지난 오년을 생각해.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도 슬픈 것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미치겠네, 답답하네, 그래도 또 필사적으로 팔을 힘껏 뻗어 연결된 우리의 울타리 안에서 지켜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운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 매번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인 이상 이 패닉과 두려움에 익숙해지고 무뎌질 날도 오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그냥 좀 더 잘 견디는 법을 또 생각해야할 뿐인 거다.
대통령 당선 결과를 보니 욕이 절로 나온다. 이놈의 나라 어디에 내놔도 또 쪽팔리구나, 싶다. 민주당 개자식들 정신 차릴 날은 언제 오려나 싶고 세상이 하 수상해서 결국 방어 투표를 한 게 눈물나게 한 맺히기 일보 직전이라 진보 정당에 인생 최초로 당적을 두고 적극적인 지지와 연대를 해야 하나 싶은 게 어이가 없다.
결국 또 토해내야 되는 구나 시이이이발 그런 심정으로, 일단 여기까지 써보고 또 좀 견뎌도 보고 싸워도 봐야지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