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숨김 Sep 26. 2020

진실게임

마취 11 OCT 2020 @섬

-반갑습니다ㅡ 존 씨, 리처드입니다.

의사가 병실에 도착했을때 남자는 침대를 세워 기대앉아 있었다. 이미 대략적인 증상을 동료의사에게서 전해듣고 왔던 터였다.

남자는 한눈에 봐도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거친 피부와 눈썹에 진하게 난 상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그래도 날카로워보이는 얼굴의 그는 눈썹을 더더욱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그 마술사 양반인가?

거친 말투의 남자는 심한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벌써 치료한지 몇개월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밤마다 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마술사가 아니고 저는 최..

-알고있네. 최면인지 뭐시기. 의사놈이 본인이 날 치료하지 못하겠으니까 최면치료를 권유하더군. 난 그런 사람 마음 조종하는 짓거리따위 믿지 않으니까 허튼 수작부리지 말고 좋은 말할때 나가게.

의사는 예상했다는 듯 작게 숨을 들이쉬곤 마음을 다잡고 준비한 말을 꺼냈다.

- 사람 마음을 조종한다라.. 더러는 그렇게들 얘기하곤 하지요. 하지만 최면은 누군가를 조종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면에 걸려있어도 대답이나 반응은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어요. 자기가 하는 말이나 상대방의 말도 인지할 수 있고요. 굳이 비유하자면 혼자 멍때리면서 망상에 빠질 때와 비슷한 느낌? 현실적인 감각은 흐려지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있던 기억은 또렷해지는 느낌이랄까요. 무의식 속의 병의 근원을 파악해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는 거죠. 최면치료도 국가에서 인정한 정식치료법이예요. 보통 일반적인 치료법이 들지 않을 때 최면 치료를 활용합니다. 스트레스나 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정신질환 치료에도 활용하죠.

많은 사람들이 최면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최면을 통해 마음과 육체를 컨트롤하는 능력을 강화할 수 있어요. 듣자하니 밤마다 고통이 심해서 잠도 못잘 정도라고 하던데.. 이제 그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세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물론 제가 알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나, 제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와 얘기하고 싶지 않은 당신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겠죠. 하지만 당신과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인데다, 그저 당신을 치료하기 위해 온 저에게 이렇게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 그럼... 시작해볼까요? 하기싫은 말은 억지로 하지마시고, 하고싶은 말만 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살짝 긴장한듯 보였지만 이내 수긍했다. 의사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 먼저 눈을 감고 편안하게 천천히 호흡하세요. 몸의 긴장을 푸시고 오직 스스로의 숨소리에 집중해보세요. 마음 속에 떠오르는 불안함과 우울한 마음을 잠시 한 곳에 치워두고, 오로지 자신의 몸의 반응을 느껴봅니다.

어깨의 긴장을 풀고 팔꿈치를 펴주시고, 손에서 다리로, 종아리, 발까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면서 몸의 감각을 느껴보세요. 발 밑에는 단단한 바닥이 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겨보세요.

당신의 앞에 나무 계단이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나무 계단을 한칸씩 한칸씩 내려가봅시다. 삐그덕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네요, 천천히 발을 옮겨 내려가보세요.

계단의 끝에 문이 있군요. 문을 열고, 나가보세요.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가장 무료했던 기억" - 교도소 복역 기억

-... 바닥에 모래와 하얗게 그어진 선을 보니 운동장이로군.

- 운동장 주변으로 무엇이 보이나요?

- 똑같이 생긴 창문으로 가득한 높은 회색 건물들이 보이네.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있군. 나역시 마찬가지고. 가슴팍에 명찰같은 게 보이는데.

- 이름이 써져있나요?

- 아니, 숫자들이 써져있네. 내가 복역했던 교도소구먼. 점심을 먹고 나면 중간에 한번씩 운동장에 나와 바람을 쐬게 해줬지. 물론 1시간도 안되었지만...

- 그곳에서 뭘하고 있나요? 앉아있나요, 서있나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나요?

남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다네. 누군가들은 이 안에서도 인연을 만들곤 했지만 나는 그저 시간이 흘러 한시라도 빨리 나가기만을 기다렸었지. 하루종일 감방안에 있다가 주는 밥을 먹고 다시 내다놓고, 운동장에 내보내주면 앉아있다가 다시 들어와서 시키는 일을 하고 잠이 오면 자고. 얌전히 있었던 덕분에 모범수로 분리되서 형량이 몇개월 줄긴 했지만 정말 내인생에서 가장 불필요하고 무료한 시간들이었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


- 자, 그럼 이번엔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봅시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이번엔 과거로 돌아가봅시다. 시계를 떠올려보세요. 시계바늘이 빠르게 돌아가고, 당신의 몸이 점점 더 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몸이 점점 더, 점점 더 작아지고 또 작아집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서서히, 서서히 점점 더 느려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천천히 느려지는 시계바늘이 시간 단위, 분단위, 그리고 초단위까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초의 순간 사이에도 간격이 있고, 그 간격 사이에는 1초보다도 더 작은, 아주 많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순간들을 고무줄 당기듯 늘이다 보면 마침내 당신 주위의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고 있네요. 누구인가요?

- 내 아내군. 장소는... 까페. 내가 그녀를 처음으로 만났던 곳이네. 아내가 일했던 곳이기도 하지. 길에서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따라갔더니 거기로 들어가더군. 그 까페 앞을 얼마나 서성거렸는지... 퇴근하는 그녀에게 겨우 말을 걸고... 첫 데이트 신청을 했네. 그녀의 승낙을 받아냈을때 얼마나 기뻤었는지. 우리는 곧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했지.

그는 행복한 듯이 웃다가 곧이어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띄웠다.

-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는 현실을 깨달았네. 나는 돈도 없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그저 사랑에 빠진 한심한 젊은이였어. 말로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해놓고 고생만 잔뜩 시켰지... 그나마도 가진 돈을 친구의 사업에 투자했다가 전부 날리곤 입에 겨우 풀칠하면서 살았네. 아내는 무슨일이든 닥치는 대로 일하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자존심때문에 그러질 못했어. 그러다 해서는 안될 짓에 점점 손을 대게 되었지.

남자는 여러가지 감정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 처음엔 가게에서 몰래 물건을 훔치길 반복했어. 그때 한번이라도 걸렸어야했는데 나는 손이 빨라서 한번도 들킨 적이 없었지. 나중엔 점점 더 간이 커져서는 심지어 남의 집에 들어가 금품을 훔쳐나오기도 했었지. 그러고보니 도둑질을 그만 두게 된 사건이 떠오르는군. 여느때처럼 물건을 훔치러 어떤 집에 몰래 들어갔지. 아주 좋은 집이었어. 하얀 벽에 대리석 기둥이 있고, 중정의 작은 연못에는 분수와 하얀 조각배 모형이 떠있었지. 물건 훔치러 들어갔다가 집이 너무 아름다워서 구경하느라 잠깐 목적을 잊을 정도였다니까. 정신차리고 안방에 가서 서랍을 열려고 하는데, 집주인 부부가 들어온거야. 나는 후다닥 소파아래로 몸을 숨겼어. 그런데 부부가 싸우는 것 같더라고. 잠시 들어보니 여자문제인 것 같았어. 어느 순간 싸움이 격해지더니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고, 그 뒤로 쿵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쓰러지는 거야. 여자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남자가 몸을 숙여서 여자를 확인하는 것 같았어. 몸을 숙이면서 남자의 발목에 작은 배가 그려진 타투가 보였어. 그리곤 다시 일어서서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가 밖으로 나가더라고. 나는 한참동안 숨을 죽이고 있다가 남자가 나간 사이에 몰래 그 집을 빠져나왔지. 그 이후로 다시는 몰래 다른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어. 하지만 먹고 살려면 돈은 계속 필요했고... 그래서 대신 몰래 마약을 팔기 시작했지.  

의사는 움찔했지만 최면에 빠져있던 남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음, 다음 기억으로 넘어가 볼까요? 어떤 장면이 보이나요?

-여기는 ... 접견실이군. 너무나도 기억이 강한 날이야. 아내가 교도소로 찾아왔었던 날이지. 

몰래 마약을 팔다가 갑자기 잡혀와서 몇개월째 실형을 살고 있었어. 갑자기 사라진 나를 수소문 하다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된거야.

남자의 눈가가 붉어졌다.

- 그녀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스스로 한심하면서 너무 화가 났어. 나를 찾아와 준 것을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아내에게 다신 여기 오지 말라고 화를 내고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어. 그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가 그때 그렇게 울면서 뛰쳐나가서는 바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녀에게 한 마지막 말이 내앞에서 당장 꺼지라는 말이었다는 게 너무나도 스스로 화가 나고 후회스럽고.....

남자의 눈에서 후회의 눈물이 흘렀다.

-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예요. 당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뿐이죠.

의사는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 ... 저도 아내가 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먼저 떠났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답니다.

만약 아내분이 살아계시다면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 있나요? 한번 상상해봅시다.

- 먼저 맛있는 아침을 만들어주고... 약속만 해놓고 한번도 만들어주지 못했거든.

그리고 우리가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던 곳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네.


남자의 눈에서 또다시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 마지막으로 아내분에게 하지 못했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 미안했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남자가 말을 하자 남자의 눈앞에 환하게 웃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다정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마치 남자가 한 말을 듣고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눈 앞에 있던 그녀는 손을 흔들며 조금씩 멀어져갔고, 점차 형체도 희미해져갔다. 남자는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멀어져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텅비었던 것 같은 마음이, 상처받았던 기억들이, 그리고 스스로 느꼈던 괴로운 감정들이 행복한 색채들로 다시 따듯하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 자, 이제 깨어날 시간입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호흡을 열번 반복합니다. 손가락 발가락을 조금씩 움직여보세요. 그리고 눈을 뜨면서 완전히 깨어납니다.

남자는 힘겹게 눈을 떴다. 온 몸이 굳은 것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를 여운이 가슴 속에 깊숙하게 남는 기분. 남자는 눈물 자국이 남은 멍한 눈으로 의사를 올려다보았다.

- 깨우고 싶진 않았지만 최면을 하고 나면 반드시 완벽한 각성과정을 거쳐야 부작용이 없어서요. 어떠셨나요?

- 음...기분이 좀 묘하네. 민망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사실 이게 정말 될까하는 불안감도 있었거든. 혹시 내가 무슨 실수같은 걸 하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 전혀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게 제 일인걸요. 어떻게, 효과를 좀 느끼셨나요?

- 음, 전과 달리 마음이 정말로 많이 가벼워진 것 같군.

-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혹시모를 부작용을 방지할 수 있도록 수면유도제를 놔드릴게요.

의사는 남자의 팔을 고무줄로 묶고, 옆에 있는 주사기의 캡을 열었다. 그리곤 들고 온 가방을 열고 약품을 꺼내 주사기에 채워넣고 남자의 팔에 천천히 바늘을 찔러넣었다. 하얗고 불투명한 액체가 주사바늘을 통해 혈관 속으로 타고 들어갔다.

- ...잠에서 깨고나면 더욱 편안해지실 거예요. 편히 주무세요.  

- 내 평생 이렇게 기분좋게 아득한 경험은 처음이었다오. 고맙네, 의사양반.

감겨진 두 눈과 그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마치 아주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서서히 잠드는 남자를 뒤로 하고 돌아선 의사는 가방을 챙겨 병실에서 나왔다. 서둘러 나오던 의사는 다른 병실에서 나오던 간호사와 마주쳤다.

-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늦게 끝났나봐요, 선생님.

간호사가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의사, 리처드가 대답했다.

- 네, 오늘은 얘기가 좀 길었네요. 저도 얼른 가서 좀 쉬려고요.

- 그래요, 가서 푹 쉬세요. 그전에 신발끈부터 묶고요. 한쪽이 풀려있네요.

의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간호사 말대로 오른쪽 신발끈이 풀려있었다.

- 알려줘서 고마워요, 마리. 신경써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 모양이네요... 어, 잠깐..

그는 간호사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붙은 실을 떼어주곤 오른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 다음엔 선생님말고 리처드라 불러줘요.

얼굴을 붉힌 간호사는 수줍어하며 다른 복도로 사라졌다. 리처드는 한숨을 쉬며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끈을 묶었다. 몸을 숙이면서 드러난 그의 발목 위에는 바지단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조각배 문양의 타투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남자는 그가 했던 말들을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내려고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면마취나 최면이 깨고나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물어보는 환자들이 종종 있다. 환자의 비밀과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고, 환자를 안심시켜주는 것이 곧 의사의 책임이자 의무이니까. 그리고 리처드는 그 의무를 지킬 것이다. 영원히.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살이 인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