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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Sep 26. 2020

오일페인팅

오일 25 Sep 2020 @섬

열린 창문으로 오직 하늘만이 보이는 방 안의 창가 앞에 한 남자가 골똘한 표정으로 서 있다. 깔끔한 나무바닥은 반들반들했고, 올리브색 페인트로 칠해진 벽과 회색빛을 띤 하늘색으로 칠해진 커다란 창문틀로 이루어진 이 스튜디오는 건물의 꼭대기 5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자 앞에 세워진 커다란 나무 이젤과 마치 장식처럼 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걸려있는 팔레트들이 이 작업실의 주인이 화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벌써 한참 동안을 캔버스 앞에 높인 의자에 앉아있다가, 의자 뒤로 가서 서있다가, 방 구석 또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슬그머니 뜨고는 캔버스의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남자를 역시 한참동안 바라보며 건너편에 앉아있던 남자는 좀이 쑤시는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방해하고 싶진 않네만, 언제쯤 시작할 것 같은가? 잠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올까 싶어 그러네."

"이봐, 조르그. 자네는 이미 내 작업스타일에 대해 잘 알지 않나. 그냥 보이는 것을 스케치하고 색을 칠하는 게 아니라 작업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니까. 내 마음 속, 이 캔버스의 영혼이 나에게 말을 걸어줘야 한다고. 나는 그 영혼이 스스로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는 걸세. 보챌수록 내 눈앞에서 오히려 달아나 버린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게."

"벌써 5시간 째네. 자네가 이젤과 책상 위치를 바꾼 것도 지금 벌써 스무 번은 된다고."

정확히는 27번째지만, 하고 마음 속으로 읊조리며 조르그는 팔짱을 꼈다. 

"역시 예리한 관찰력이군.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런 매의 눈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겠지, 헤드오브 페인팅? 자네 직원들은 자네가 보채면 어쩔 수 없이 말을 듣겠지만, 나는 나 자신도 어쩔수가 없다네. 영감이 와야 작업을 완전한 상태에서 시작할 수가 있다고."

초조한 자신과는 다르게 마치 명상을 하듯 느긋하게 앉아 눈을 찡긋거리고 있는 남자를 보며 조르그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에 잡히는 주름을 눈을 꿈틀거리며 없애려고 노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려가서 커피한잔 하고 오겠네. 자네도 한잔 할 텐가?" 

"아닐세, 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니까. 자네가 갔다오기 전에 영감이 떠오르길 바라야지."

고개를 마지못해 끄덕이며 조르그는 코트를 챙겨 문을 나섰다. 

조르그가 그를 그리는 것은 거의 7년 만이었다. 마지막은 함부르크에 있던 남자의 작업실에서였다. 

그가 베를린에 구한 작업실은 함부르크에 있던 작업실과 똑같이 꼭대기층이었다. 이유 역시 같았다. 꼭대기 층이 제일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자의 그림에 어딘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많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르그는 건물 1층에 자리잡은 까페로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테라스에 나와 앉은 그는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날씨는 가을 끝무렵이라 쌀쌀했고, 사람들의 옷차림또한 어두웠다. 주말도 이렇게 지나가겠군, 조르그는 검지와 중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러 돌리며 생각했다. 손가락에서는 희미하게 휘발유 냄새가 났다. 그의 세팅은 5시간 전부터 이미 끝나있었지만, 도대체가 그림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 친구 때문에 나름 오랜만에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에 부풀어 있던 마음도 살짝 김이 새있었다. 그의 유혹에 넘어가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리라, 조르그는 생각했다. 


남자와 조르그는 드레스덴의 미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이었다. 다소 침침하고 어두운 얼굴에 늘 혼자 다니던 남자와 밝고 쾌활한 조르그는 달라도 너무다른, 극과 극의 성격이었지만, 남자와 수업을 함께 들으며 그림을 그리러 다니며 둘은 어느새 가까워졌다. 우울한 얼굴이지만 어딘가 꿰뚫어보는 듯한 인상적인 눈빛을 가진 남자는 알고보니 무뚝뚝했지만 은근히 사람을 챙겨주는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기에 조르그는 그런 그의 진면목을 알아보곤 함께 어울리길 원했다. 커다란 눈망울에 밝은 갈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조르그는 주변에 늘 사람이 많았고, 그는 남자에게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해주며 그를 동굴 안에서 끌어내려 했다. 남자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생이 기구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그가 불과 7살이었을 때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의 누이들인 엘리자베스와 마리아는 발티푸스에 걸려 죽었으며, 13살 겨울에는 호수에서 동생 요한이 호수의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진 그를 구하려다 대신 죽었다. 그는 그저 동생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죄책감에 늘 시달렸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 신자로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종교관을 자식들에게 강요했다. 때문에 그는 어릴 때부터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자살충동을 반복해왔으나, 그림으로 그것을 표출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어느정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한 듯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화풍은 세간에서 금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조르그는 그런 친구가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부럽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그의 다른 친구들 역시 화가 또는 예술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순간부터인가 조르그는 더이상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남들은 저절로 그림의 영감이 떠오른다는데, 자신은 왠지 그러질 못했다. 게다가 세간에서 주목받는 절친한 친구의 대단한 그림을 보면 볼수록, 그리고 그 그림으로 인정받는 친구를 볼수록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자괴감에 빠졌다. 하지만 조르그는 우울한 생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런 류의 성격이 아니었다. 특유의 강한 친화력으로 모임에서 알게된 지인을 통해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처신을 잘 한 덕에 도자기 공장의 페인팅 부서 팀장, 헤드 오브 페인팅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미래가 막연하고 벌이가 변변찮은 예술가보다는 따박따박 월급을 받는 생활이 자신에겐 안정적이고 잘 맞았다. 하지만 그의 친구는 그런 조르그를 안타까워하며 자꾸 그림의 세계로 유혹하는 것이었다.

"자네 그동안 배운 것이 아깝지도 않은가? 도자기 공장이라니... 물론 벌이를 생각하면 거기가 더 나을지 모르지만 똑같은 걸 찍어내듯 그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남자가 특유의 올라간 눈썹을 더더욱 위로 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뭘 그려야할지 모르겠는걸. 나는 자네처럼 뭔가 보이는 사람이 아니란 말일세." 

조르그는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일단 내 작업실에 나와서 한번 생각해보게. 응? 자네의 재능이 아까워서 그래. 학교에서 같이 그릴 때처럼 한번 해보자고."

고집스러운 눈매만큼이나 강한 남자의 고집에 넘어간 조르그는 주말이면 그의 작업실에 들르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그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남자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막상 작업실에 와보니 그릴 대상이라곤 오직 남자와 커다란 캔버스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를 그리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작업을 시작하는 데에만 거의 반나절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번에 그를 그렸던 것은 거의 1년이 넘게 걸렸더랬지, 조르그는 떠올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다른 화가들처럼 스케치를 하거나, 그림에 칠할 컬러를 만들어보는 일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보조작업들이 자신의 상상력과 내면의 세계를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영감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물감도, 린시드 오일과 테라핀유도, 석유통도 모두 다른 방에 가져다 놓거나, 캔버스 뒤에 보이지 않게 감추어져있기 마련이었다. 스튜디오는 그에게 있어 오직 순수하게 집중할 수 있는 장소였고, 그는 어느 것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환경을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때로는 스스로를 작업실에 가두었다, 고 말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자기 작업실에 조르그를 부르는 것은 사실 정말 큰 의미였다. 특히 이제 갓 결혼한 새신랑으로서 주말을 오직 친구와만 보낸다는 것도ㅡ물론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작업실에 죽치고 있으며, 본인때문이 아니어도 본래 주말까지 주로 작업실에서 보내는 친구이긴 하지만ㅡ 나름 평일엔 직장에 나가는 자신을 배려해서인듯 했다. 하지만 주말마다 말도 없이 캔버스 앞에만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파티를 즐기는 조르그로서는 친구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것이었다. 물론 그 친구는 이게 다 조르그를 위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커피잔에 남은 마지막 모금을 비운 후 조르그는 다시 건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올라갈 때마다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 높이였다. 5층이라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한 이마를 소매로 슥 훔쳤다. 멀리서 희미하게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휘발유가 섞인 기름 냄새였다. 층계를 올라갈수록 냄새는 점점 더 진해졌고, 냄새의 진원지인 문앞에 다다르자 머리를 찌를듯이 강한, 익숙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드디어 작업을 시작했군!'

이제 드디어 붓을 손에 쥘 수 있겠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르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Georg Friedrich Kersting, <Caspar David Friedrich in seinem Atelier (Berliner B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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