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Mai 2021 @온라인백뻘게
1.
간만에 친구와의 즐거운 모임 이후 집에 가는 길. 어둑해진 밤하늘과 주황색 가로등 아래 인적이 드문 골목을 지난다. 날씨가 선선하니 좋아 C는 집까지 걸어가기로 마음 먹고 강가 쪽으로 길을 틀었다. 가방에서 헤드폰을 꺼내 쓰곤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스케이드 보드를 내려놓은 후 오른발을 올리고, 왼발로 조심스럽지만 힘차게 밀어본다. 기분좋게 얼굴로 불어오는 살랑바람에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얼마전 몇년만에 나온 Kings of Convenience의 새로운 싱글이 흘러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스타일이지만, 그 익숙함에 안심이 된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우연히 마주쳤는데 여전하구나, 싶은 느낌이 들어서.
C의 집은 5분만 걸어나오면 바로 강이 쭉 이어지는 강변에 있는, 탁 트인 전망이 좋은 건물의 7층이었다. 본래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느라 집에 잘 붙어있지 않았던 C는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원룸에서 투룸으로, 층이 낮은 빌라에서 빛이 잘 들고 뷰가 좋은 고층 오피스텔로. 환경이 바뀌자 보이는 시야도 달라졌다. 매일 아침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쏠쏠한 재미가 되었다. 공원이 앞에 있으니 자꾸 나가서 산책을 하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조망권, 뷰세권, 하나보다.
집 건물쪽으로 향하는 샛길로 들어선 C는 무심코 위를 쳐다보았다. 아담한 건물 옥탑에 불이 켜져있는 창가로 늘어선 식물들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향했다는 걸 문득 의식하곤 머쓱해진 C는 괜히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돌리곤 집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2.
그 집이 눈에 띈 것은 약 한 달 전쯤이었다. 그것은 높은 건물들 사이로 오직 그 건물만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난히 눈에 띄는 파란색 지붕 때문도, 마치 식물원처럼 가득한 발코니의 초록빛 식물들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빨래 때문이었다.
오늘 날씨와는 다르게 세차게 비바람이 내리던 날 C는 집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거세게 비가 내린다 한들, 안전한 집 안에 있으면 그 역시 그저 멋진 풍경이었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면서 생각없이 어느때처럼 밖을 보던 C의 눈에, 비가 들이치는 발코니에서 위태롭게 빨랫대에 걸려있는 보라색 티셔츠가 들어왔다. C는 그 보라색 티셔츠가 어떤 것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C 역시 같은 티셔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년 전 영국에 있을 때, 꿈에 그리던 음악페스티벌 티켓을 운좋게 얻은 적이 있었다. 티켓이 비싸기도 했지만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여러 번 시도했었더랬다. 결국 반쯤 포기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가 남은 티켓이 생겼다며 사이트에 티켓 양도글을 올렸고, C는 빠르게 연락해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페스티벌은 기대했던 만큼 만족스러웠고, 평소 보고 싶었던 뮤지션들도 수많은 인파 속에서나마 직접 볼 수 있었다. Kings of Convenience도 그때 실물로 처음 봤었다. 그 순간을 추억하기 위해 C는 행사 굿즈를 파는 부스에서 해당 년도와 참여 뮤지션들이 가득 적힌 티셔츠를 샀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티셔츠가 아니었고, 심지어는 색깔도 아주 특이하게 조색된 보라색이었기 때문에 C는 저 티셔츠가 그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동안은 친구들이 이제 그만 좀 입고 다니라며 핀잔을 줄 정도로 오직 그 옷밖에 없는 것처럼 입고 다녔었는데, 지금은 옷장 한켠에 넣어두고 집에서 가끔 홈웨어로만 입곤 했다.
'이렇게 비바람이 부는 바깥에 저렇게 널어놓다니... 집 안에 사람이 없나?'
안타까운 마음에 한참 바라보던 것도 잠시, 마침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C는 고개를 돌려 탁자 위의 핸드폰에 손을 뻗었다. 친구 M이었다. 농담 따먹기로 시작해 자질구레한 얘기를 나누다 문득 티셔츠 생각이 난 C가 다시 창가로 가봤을 때, 빨랫대의 티셔츠는 사라져있었고 C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부엌으로 향했다.
3.
그다음 날은 전날 세차게 내린 비가 무색할 정도로 맑았다. 책을 읽다 커튼을 치는 것을 깜빡하고 그대로 잠들어버린 C는 이른 오전 방안 가득히 들어오는 강렬한 아침햇살에 잠을 깼다. 거실로 나가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하곤 머리를 긁적거리며 늘 하던 것처럼 창밖을 내다보던 C는 보라색 티셔츠가 다시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씩 웃었다. 어제 비를 잔뜩 맞아서 다시 빨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날이 맑으니 아마도 빠삭하게 잘 마르리라.
하루 종일 재택근무를 한 뒤 피곤해진 눈을 잠시 감고 있다가 C는 저녁을 먹기 전 조금이라도 걷고 뛰어볼 요량으로 대충 옷을 갈아입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항상 달리던 코스를 돌고, 평소처럼 다시 천천히 돌아오는 길에 그는 그를 빠르게 스쳐 지나치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그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여린 어깨에 짧은 머리를 질끈 묶고 다부지게 뛰는 뒷모습을 C는 한참 바라보았다. 뮤지션들의 이름이 가득 적힌 티셔츠 뒷면이 눈에 들어왔다. 반갑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여 피식 웃었다. 세상 참 좁다.
4.
"뭐하고 있냐?"
"어, 지금 내일까지 마감인 거 있어서 작업하고 있었어. 왜?"
"나 이따가 아는 친구 볼 건데 너 소개도 시켜줄 겸 같이 볼까 해서. 시간 되면 얼굴보자고."
"아.. 내일까지 마감이라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잠깐이라도 들렀다 가. 너네 동네 근처에서 볼거니까"
"알겠어 그럼, 진짜 잠깐만 들른다?"
"오키, 그럼 이따가 5시에 우리 전에 만났던 까페에서 만나자. 좀 이따 봐!"
"그래 알았어, 곧 보자."
M과의 전화를 끊고는 C는 하고 있던 작업에 다시 집중했다. 거의 다 끝내긴 했지만 왠지 마무리가 맘에 들지 않아 재작업을 하던 참이었다. 왠만하면 마감 전날은 약속을 잡지 않는 C였지만, 이 작업은 클라이언트 측에서 이런저런 요구로 질질 끈지 몇 주째라 얼른 끝내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수정사항들만 고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치다보니 자잘한 것들이 생각보다 계속 늘어나는 바람에 C는 약속에 늦고 말았다.
"... 늦어서 미안, 죄송합니다. 정리 좀 하느라 시간이 걸렸어."
"너네 집앞에서 만나는데 늦냐. ㅎㅎ 음료 주문했어?"
"괜찮아요, 친구 한 명도 불렀는데 아직 안왔거든요. 얘도 집이 코앞인데 늦네요ㅎㅎ"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뛰어오는 모양새가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든 것도 잠시, 그 사람이 자신들의 테이블로 다가오자 C와 M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어, 왔어? 여기 M은 전에 몇번 봤지? 여긴 친구분 C." Y가 소개를 하자 K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작은 체구의 K는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M과도 몇번 본적이 있던 터라 분위기는 친숙했고, 비슷한 동년배인 것을 알고나자 다들 바로 말을 편하게 놓았다.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편했다. 최근 재택근무를 하며 온라인 미팅으로만 사람을 만나던 C는 이렇게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특히 K와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영국의 같은 동네에서 지냈던 데다, 좋아하는 음악취향이 비슷하고 서로 공통사가 많았다. 음악과 사진을 좋아하던 그녀는 전세계의 페스티벌을 돌며 사진을 찍으면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며, 지금까지 다녔던 페스티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C 역시 자신이 다녀온 축제와 페스티벌 얘기를 하며 자신도 모르게 신나게 떠들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 잠시 머쓱해지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던 그들은 차가워진 밤공기가 내려올 때까지 앉아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5.
"그럼 우리 다음에 또 보자, 오늘 재밌었어!"
"그래 다들 잘가, 안녕."
M과 Y가 지하철 역으로 들어가자, C와 K는 몸을 돌려 동네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면서도 이야기는 잠시도 끊이지 않았다. 문득 오늘 처음 만나 알게 된 사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그들은 도서관을 지나 코너를 돌았다. 그리곤 그녀가 멈추었다.
"여기가 우리집이야. 그럼 나중에 또 봐!"
"여기가.. 너네 집이라고?"
"응, 왜?"
C가 당황한 듯 묻자 K가 되물었다. 바로 그 티셔츠가 걸려있던 건물이었다. C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보라색 티셔츠가 K의 것임을.
"아.. 아니 너무 가까워서. 우리 집도 여기 완전 근처거든. 저기 보이는 저 건물이야."
"아 정말? 와 진짜 가깝네! 이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어."
"나중에 한번 놀러와, 자주 보자, 동네주민!"
"그래, 또 보자. 조심히 들어가!"
K가 건물로 들어가자, C는 집으로 향했다. 괜스레 피식 웃음이 났다. 세상 진짜 좁네.
나중에 공원이나 같이 뛰자고 할까. 그럼 그 티셔츠를 입고 나오려나? 기든 아니든, 나도 간만에 그 티셔츠를 빨아입고 나가봐야겠다고 C는 생각하며 신나게 집으로 향했다. 비록 아직 마감이 남아있었지만, 마음은 시원한 밤공기만큼이나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K의 관점이 추가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