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어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단어를 생각하고 이 글을 클릭했는지 궁금하다. 등산? 아니면 오름? 내가 제시할 답은 많이들 들어본 단어일 거고 이것을 생각하며 클릭한 사람의 수도 적지 않을거라 짐작된다. 흔히 클라이밍을 우리말로 '등반'이라 번역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부터 등산과 등반을 착각해 사용하는 일이 없어진다.
이 단어를 실감하는 순간이 언제일까? 나는 자연암벽에 처음 붙어볼 때라고 확신할 수 있다. 외벽도 아니고 자연암벽에서다. 원주에 있는 간현암장에서, 겨우 5.7을 줘도 후할 것 같은 그레이드의 자연암을 탑로핑으로도 쩔쩔매다말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등반登攀'이네.
사실 나는 겁이 많다. 동네 암장에 다니다보면 듣게 되는 외벽이며 자연암벽이라는 단어와 나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 믿었다. 내가 살며 그런걸 할 것 같지 않았다. 저 줄은 어떻게 믿고 하네스는 어떻게 믿으며 줄 잡아주는 사람은 또 어떻게 믿는담...? 내게 묶인 매듭이 어떻게 풀리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됐다. 심지어 볼더링에서의 낙하 높이와 외벽의 낙하 높이는 천지차이다. 떨어지면... 죽는다. 아니, 다 떠나서, 내게는 저렇게 높이 올라갈만한 담력이 없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띄워준 영상만 봐도 손에 땀이 차고 뒷골이 서늘했다. 외벽도 외벽이지만 자연은 또 어떻고. 인공보다 가차없는 게 자연이고 산이다. 사람이 왜 절벽에 기를 쓰고 기어올라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 인공암벽을 체험해보고 더욱 느꼈다. 이게... 재밌나...?
하지만 남들이 하면 다 해보긴 해봐야 하는 - 그러니까 찍먹은 해야하는 성미가 어느날 발동을 했다. 사실 오래 꾸준히 같은 암장을 다니던 동료의 끊임없는 설득도 있었다. 한번 해보긴 해봐라, 클라이밍을 완전히 다르게 보게 된다, 따위의 말들이 와닿아서 이걸 해보기로 결정했...을리가 없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등산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해봐야 이 모든 게 완결될 것 같았다.
외벽을 리드로 타보고 자연암도 붙어봐야 아 나 다 해봤다, 이건 싫고 저건 좋고, 그러니까 난 이걸 계속 할래, 라는 결정에 근거가 생길테니까. 언젠간 해봐야지...는 늘 마음 끄트머리에 남아 언젠간 진짜 해봐야되는데......로 날 괴롭히니까. 그렇게 올해 봄과 여름, 이 주에 한 번씩 총 일곱 번, 외벽과 자연암에 붙어봤다.
가야하는 곳을 블로그로 찾아보며 덜덜 떨었다. 일주일동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가기 전날엔 배가 아프고 내가 왜 이걸 선택했을까...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어김없이 집합시간에 맞춰 눈을 뜨고 차에 실려서 저 어젯밤부터 긴장해서 배가 아프더라고요... 하는 고백을 해가면서도 산으로 갔다. 분명 하네스며 퀵드로우를 살 때는 신났는데 그걸 내 몸에 착용하니 더이상 신이 나지 않았다. 내 차례라는 말에 빼지 않고 벽으로 간 게 내가 쓸 수 있는 최대치의 용기였다. 그러면 또 신기하게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인간에게는 오르는 본능도 있다는 것을 간현암 첫 등반에 알게 됐다. 붙으면 내가 올라온 높이는 기억나지 않고 오로지 올라가야된다, 는 마음만 든다(사실 완등해야 개운하게 내려올 수 있다...는 판단이 절벽 위에서 들긴 한다). 손에 잡히는 돌은 울퉁불퉁 차갑고 거칠다. 상처가 나는 줄도 모르고 발을 붙이고 손으로 쥐어잡는다. 그렇게 반쯤 올라가고나면 평평한 곳에서 들었던 잡생각이 사라진다. 고요한 벽과 내 숨소리, 올라가야한다는 마음만 남는다. 그렇게 내 몸에 매인 줄도 잊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내 의식 속에서 지운 채 올라가는 데만 집중하다가 문득 깨닫고 만거다. 아 이게 클라이밍의 시작이었구나. 실내에서 내가 잡던 홀드는 다 여기서 시작된 거구나. 홀드를 잡을 때 집중되는 감각과 돌을 잡을 때의 기분은 전혀 다르구나. 완전히 몰입하는 느낌은 자연암벽에만 있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살았던 나임에도 이 감각이 친숙하다니.
그러니까, 동료가 나를 설득하며 자연에 가야하는 이유로 든, 클라이밍을 완전히 다르게 보게 된다는 게 맞는거다. 험하고 높은 절벽을 올라보려했던 무수한 마음이 이렇게 스포츠로 발전했다. 기원을 알았으니 앞으로 내가 실내에서 스포츠 클라이밍을 어떤 방향으로 해나가야 하는지 약간은 방향이 잡히는 느낌도 든다. 손보다는 발을 더 쓰는 방법을 익혀야겠고... 더 오래 벽에 붙을 수 있어야겠구나 하는...
더 신기한 건, 벽에 올라가면 내게 묶인 줄을 잡아주고 있는 빌레이어의 목소리만 선명히 들린다는 사실이다. 좀 더 가봐요, 저를, 줄을 믿으세요, 같은 말들. 나는 뭐든 혼자 해결하는 게 익숙하다. 내가 하는 운동 전부는, 그러니까 클라이밍을 포함한 모든 움직임이 혼자할 수 있는 거라 내게 맞았다. 그러나 외벽은, 자연은 다르다. 절대로 혼자 오를 수 없다. 비슷한 실력의 동료와 우리를 등반의 세계로 안내해 줄 베테랑들이 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아래에서 위에서 줄을 잡아준다. 별다른 대화 없이 절벽을 몇 번 올랐을 뿐인데 이상한 유대감이 생긴다. 벽에 올라가면 아래의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전적인 믿음이 살면서 얼마나 있었던가. 함께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알게 된다. 혼자이면서도 여럿일 수 있는 운동이 있었다.
그렇게 겁을 집어먹은 채 올라갔다 내려오면(완등을 할 수도 있고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왠지 아쉽고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을것 같다. 이상하게 자연암에 붙은 나를 계속해서 상상하게 된다. 절대 하지않겠다고, 다음 번엔 가지 않겠다고 덜덜 떨었는데 돌아와 집에 누워서는 다음에는 조금 더 잘 올라갈 수 있겠지, 기약하게 된다. 겨우 일곱 번의 등반으로 산을 즐기는 마음이 들 수야 없겠지만, 인수봉 슬랩의 오아시스에서 만난 베테랑 등반가들과 나눈 대화는 계속 떠오른다.
인수봉은 내가 가본 북한산 중 가장 고요했다. 그 고요를 뚫고 올라온 25미터 절벽 위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경치가 참 멋지다는 내 말에 그분이 대답하셨다. 이거 보려고 이렇게 고생해가며 올라오는 거예요. 그때, 초여름 답지 않은 찬바람이 우리의 땀을 식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