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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Jan 17. 2022

MBTI의 유행이 반가운 이유

내향형 인간에 대한 변호 - 오래된 오해에 관하여

내 학창 시절엔, 혈액형별 성격유형이 유행이었다. 사람들을 A형/B형/O형/AB형의 4가지로 나누고, 각각의 혈액형마다 성격을 정리한 그 내용으로 인해 특정 혈액형은 늘 편견과 오해에 시달려야 했었다. 예를 들어 A형이라고 하면, 소심하냐는 질문이 꼬리표처럼 따라왔고, B형(특히 남자)은 바람둥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유행하면서 종종 '나 무슨 혈액형인 것 같아요?'하고 서로에게 묻기도 한다. 그럴 때 무슨 형이라고 대답하면, 그럴 줄 알았어, 혹은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하는 답변이 돌아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혈액형이 뭐라고. 직접 내 피검사를 해본 것도 아니면서 혈액형을 보이는 성격만으로 짐작한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진다. 아무런 과학적 증명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특징을 나누고, 구분하여, 판단하곤 했다. 


한때 유행했던 혈액형별 만화. 나도 참 열심히 봤었다.


이 혈액형별 성격 유형을 즐기던 세대가 점차 성숙한 나이가 되어 그것이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서 차츰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쯤 새롭게 등장한 것이 있다. 바로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언제부턴가 인터넷 상에서 MBTI의 약식 검사지 링크가 돌기 시작했고,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흥미요소로 급부상하더니, 나중에는 방송에까지 나와 연예인들에게 MBTI가 뭐냐고 묻는 단골 질문으로 등장했다. 이 MBTI는, 그래도 혈액형의 4가지 구분보다는 더 심층 있는 16가지이며, 심리학자 융(Jung)의 성격유형 이론을 근거로 제작되어 나름의 뒷받침되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혈액형별 성격보다는 전문적이다. 


MBTI를 결정하는 8가지 성격 특성. 이 글자들의 조합으로 16가지의 성격 유형이 나온다.


나는 이 MBTI를 고3 이후, 갓 20살이 될 때쯤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지금 인터넷 상의 약식 검사가 아닌, 정식 대행 기관에서 종이로 된 검사지로 돈을 지불하고 받았었다. 당시 나는 굉장한 방황의 시기를 겪고 있었고, 직업과 진로를 결정하는 데 있어 너무 많은 고민을 안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보고자 친구와 함께 받았던 것이다. 결과는 INFP. 열정적인 중재자이자, 잔 다르크 유형.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 결과지를 보고 있는 내내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나는 무슨 어디 용한 데서 사주라도 받아온 것 마냥 감탄하곤 했었다. 나를 어떤 사람인가를 써보라고 하면 한 마디도 제대로 쓰기 어려웠을 텐데, 그 검사지에는 마치 나를 글로 정의해놓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INFP 자체보단 조금 다른 것이다. INFP 중에서도 가장 앞자리, 'I'의 유형에 관한 것이다. 4가지 중 가장 앞에 나오는 알파펫, E와 I는 여러 성격 특징 중 가장 눈에 도드라지게 띄는 형태다 보니까 어떤 사람의 MBTI를 짐작할 때 나머지 세 가지에 관해서는 몰라도, 맨 앞은 가능했다.


E(외향형), 그리고 I(내향형). 


MBTI로 인해 지금은 내향형이라는 말이 주로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내향형 인간을 통칭하는 말로는 '내성적인'이 있었다. 영어권으로 가면 'Shy' 하다라고 소개되는 이 내성적인 인간은, 언제나 외향적인 사람에 비해 어딘가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받아야 했다. 혹은 사회 부적응자, 또는 친구 없는 외톨이 등 대부분 부정적인 성격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학교 생활에서도, 직장 생활에서도 마이너스 요소로서 인지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는 순도 99%를 자랑하는 그 '내성적인 인간'의 완벽한 거울이었다. 


말을 많이 안 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어렵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무서워하는. 그래서 부모님의 걱정거리가 되곤 했던. 내성적인 성격은 반드시 고쳐야 하는 것으로 취급받던 그 시간들 속에서 나도 참 많이 괴로워했었다. 그래서 한 때 외향적인 척 굴려고 노력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써도 결국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데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나는 그냥 내가 되기로 했다. 내향형 인간이라고 해서,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사회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사회적인 역할을 다 하고 있고 아무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의 성격의 단점을 장점으로 극복한 사례를 쓰라는 자소서에도 '내성적이지만 이러이러하게 노력해서 외향적으로 바꾸었다'라고 꾸며대며 만약 취업하면 금방 들켜버릴 거짓말을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MBTI의 등장은 이러한 수많은 I 유형들에게 가진 편견들을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 지표가 되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늘 남들 앞에서 나서야 하고, 늘 말이 많고 활발해 보여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국민 MC 유재석 또한 'I'유형이다.) 나는 이 MBTI의 유행을 지켜보면서 그 점이 가장 좋았다. '내향적인'성격이 어딘가 모자라거나 부족한 게 아니라, 단지 그런 성향인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계기가 되어서. 이 기회를 틈타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몇 가지 I 유형에 대한 오해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친구를 사귀려면 네가 마음을 열어야지"


내향형 사람이 친구 사귀는 법이라고 트위터에서 떠도는 글. 너무 적절해서 웃음이 난다.


학창 시절의 나는 정말 조용한 학생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말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선생님과 면담을 하다 보면 꼭 이런 결론으로 나곤 했다. 네가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라는 것. 그러나 오해하는 것이 있다. 내향적인 사람들이 말을 많이 안 하는 건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마음은 언제나 열려 있다. 누가 내게 말만 걸어주면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내향적인 사람들을 감히 대표하여 말해 본다. 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어떤 말을 해야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지, 어떤 타이밍에 말을 해야 상대방이 불편해하지 않지, 이 고민이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 같은 사람이 친구를 사귀게 되는 대부분의 루트는, 외향적인 친구에게 간택당하는 일이다. 먼저 말 걸어주고, 먼저 이끌어주는 친구가 곁에 있는 순간 내향적인 친구는 그들의 말에 언제든 귀 기울여줄 친구가 되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선생님이 계시다면, 내향적인 아이에게 그렇게 조언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저 말은 오히려 내향적인 아이에게 더 자신 속으로 파고들게 만들 뿐이다. 한동안은 아이가 그 조언대로 열심히 먼저 말을 걸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순간 내 잘못으로 돌리면서 포기하게 될 뿐이니까. 



"너는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유재필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일러스트. 이 글에 대해 쓰려고 이미지를 찾다가 똑같은 제목의 책이 있어서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는 많은 내향형이 이 말을 듣고 산답니다

내향형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금기어가 있다면, 단연 이 멘트가 1위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자,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의 말투엔 대부분 '비아냥'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저 질문을 받으면 순간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지 늘 망설이게 된다.(아니, 저건 사실 '질문'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내게 무슨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날 '판단'한 다음 내뱉는 말이기 때문이다.) 꼭 매번 말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도 내가 말을 하고 싶을 땐 한다. 내가 말을 하지 않는 건, 그 대화 소재에 관심이 없거나, 아직 친하지 않아서 말하기 조심스럽기 때문이며, 또는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끼거나 하는 이유가 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주제에 관해서는 말을 많이 하고 싶고, 친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자리엔 수다쟁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저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꼭 나를 어쭙잖게 아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친구가 해준 소개팅에 나갔다가 상대가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도 있었다. 내 친구는 활발하고 말이 많아서 재밌는 사람인데, 그래서 나 역시 그런 사람일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며, 굉장히 실망한 말투로 말했었다. 그 자리서 나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소개팅 자리고, 처음 만나는 자리였으며, 그렇기에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서 웃고 조근조근, 내 성격대로 차분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단답형으로 끊어서 말한 적도 없고, 대화를 이어가는 덴 크게 부족함이 없이 노력을 다했는데. 나랑 대화한 고작 몇 시간 만에 나에 대한 걸 다 파악했다는 듯, 너는 '조용하고 재미없는 사람'이구나 결론지으며 저렇게 묻는 그 모습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기대와 달라 실망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그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티를 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너도 재미없는 사람이었단 걸 아시는지. 당신이 재밌는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내게 그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향적인 성격이에요"

MBTI에서 말하는 내향형과 외향형의 차이는, 단순히 말을 많이 하고 활발한 성격이냐,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냐의 차이가 아니다. 성향상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그 둘을 나누는 것은 '에너지를 어디서 충전하느냐'의 차이다. 외향형은 친구를 만나고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에너지를 얻는다. 쉬는 날에는 반드시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야 재충전이 되는 사람들이고, 내향형은 반대로 에너지를 집에서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통해 충전하고, 밖에 나가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이라는 것뿐이다. 이 MBTI라는 것 덕분에, 내향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조금 거둬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외향적이고, 활발한 사람만이 환영받는 분위기 속에서 언제나 억눌려 있었던 것만 같았던 나는, 그전까지는 참 부정하고 싶기도 했고,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었는데(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 이제야 겨우 당당하게 나 자신을 '내향적인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네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은 입체적이고, 상황에 따라 혹은 기분에 따라 다른 성격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MBTI도 언제 검사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올 때가 있고, 성장하면서 바뀌기도 한다. 게다가 각 지표마다 점수가 주어지고, 그중 높은 쪽으로 표시되어 나올 뿐이므로 누구나 조금씩 다른 성향들이 섞여 있다. 내향적인 면이 지배적일 뿐, 외향적인 부분이 섞여 있는 사람도 있고, 외향적인 사람에게도 내향적인 면이 있을 수 있다. 16가지 다양한 성격 유형은 이렇게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되어도 그게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엔 16명의 사람이 아니라, 78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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