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Garden Jun 19. 2021

날씨의 요정은 내 편이 아니었다:
비 오는 코타키나발루

지극히 평범한 여행 소감 기록 #. 2

휴양지 여행의 기분은 날씨가 거의 99%를 차지한다. 그리고 내 코타키나발루 여행은 그 99%의 실패와 1%의 추억만 남기고 돌아왔다. 한마디로, 상처뿐인 여행이었단 뜻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여름휴가를 신청해야 하는 기간이 오면 전 국민과의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어느 날에 가야 최대한 사람이 몰리지 않고, 여름이 주는 혜택을 마음껏 즐기면서도 너무 심한 더위는 피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그동안 나름대로 터득해온 경험의 빅데이터를 돌려가며 머리를 짜낸다. 스카이스캐너에서 날짜를 한 칸씩 이동해가며 비행기표가 조금이라도 저렴해지는 날을 고르다 보니 결국 8월 말, 마지막 끝 무렵을 선택하고야 만다. 그런데 딱 그 주가 되는 순간부터 비행기 값이 뚝 떨어지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쎄함이 몰려왔지만 가격의 유혹을 포기할 수가 없어 일단 결제부터 해버렸다. 


그래도 불안하니까 나름의 검색을 했는데, 마침내 ‘10월 이후가 아니면 괜찮아요~’라는 글을 발견하고 나서야 안심을 한다. 어쨌든 시기적으로 우기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더 열심히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은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마련이니까. 나는 이제 비행기표를 구했으니 뭘 입고 갈지에 대한 행복으로만 가득했었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쓴 이유는, 앞으로의 글에 대한 스포를 미리 하기 위해서다.


2019년 8월 말, 주로 관광할 곳이 많은 여행지를 좋아하는 나는 처음으로 여름휴가를 휴양지인 코타키나발루로 가기로 했고, 내가 그곳에서 마주한 건 3대 석양이라고 불리는 핑크빛 석양이 아닌 시커먼 구름과 시원하게 내리치는 소나기뿐이었다.  

이게 진정 휴양지의 사진이라니...


휴양지로의 여행은 거의 처음이었다. 그동안의 내 여행 스타일은 무조건 돌아다니기. 아무리 떠나기 전 무조건 ‘오늘은 여유 있게 다녀야지’라고 생각해서 조금만 더 가면, 저기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정거장만 더 가면, 이걸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다 결국 숙소로 녹초가 되어 돌아와서 뻗을 때쯤 되어야 아, 오늘 하루도 보람찼다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성향 특성상 휴양지는 내 여행 목록에서 항상 뒤편이었다. 게다가 호텔에 돈을 쓰는 짓은 웬만하면 하지 않았다. 숙소는 무조건 시내 나가기 좋은 위치와 깨끗한 것만 신경 쓰고 최대한 싼 곳으로 정했다. 어차피 내내 돌아다니다 마지막에만 들어가는 숙소에 그렇게 돈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호텔에 돈을 쓰는, 그런 호화스러운 휴가를 보내보자 하는 마음으로 고급 리조트를 예약하고, 가서 입을 원피스만 5벌을 샀다, 4박 5일 여행에. 


도착한 첫날은 정말 최고로 좋았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맑은 날씨였다.


예약할 때만 해도 친구와 가기로 결정했을 때였는데, 친구가 갑작스러운 해외 출장으로 못 가게 되었다. 그래서 혼자 가려다 하다가, 일반 여행지면 상관없었지만 휴양지를 혼자 가기는 좀 심심할 것 같아 가장 스케줄 관리가 유동적이며, 쉽게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인 엄마와 함께 떠났다. (원피스를 너무 많이 사서 엄마한테 잔소리 들을까 몰래 샀는데 결국 엄마와 함께 여행 가는 바람에 다 들키고 말았다는 또 하나의 슬픈 사연이 있다)


첫날은 아주 완벽했다. 날도 좋고, 하늘도 깨끗하고. 그렇지만 첫날이니까, 슬슬 구경하자 하는 마음으로 시내 백화점들로 나갔고, 돌아오는 길에 해가 저 멀리 지고 있었던 걸 그랩 택시 안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먼발치서 핑크빛이 가득한 것이 보였다. 그러나 차가 막혀 석양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아쉬웠지만 오늘은 첫날인데 서두를 거 있나, 내일 보면 되지 하는 안일한 마음이 있었다. 그게 여행 중 마지막 석양인 줄 알았다면 막혀서 멈춰있는 택시를 박차고 나와서라도 봤어야 했는데.


코타키나발루는 휴양지기 때문에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배를 타고 호핑투어를 하면서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것뿐. 친구랑 갔으면 스노클링이나 패러세일링 등을 했겠지만, 엄마와 갔기 때문에 스포츠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배 타고 근처 섬들을 돌아보는 호핑투어나 하자는 마음으로 티켓을 예매했다. -그 날 아침까지는 분명, 날씨가 좋았었다. 




그리고 호핑투어 때 타는 배가, 예전에 싱가포르에서 빈탄 섬에 갈 때와 비슷한 유람선일 줄 알았지. 실내도 없이 사방이 트여있는 작은 배에 미친 듯한 모터를 달고 통통 거리며 튀어가는 배일 줄 알았다면… 다시 생각해 봤을 것이다. 


게다가 배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 비. 그 빗속을 그 빠른 속도의 배가 뚫고 지나가니, 마치 누가 얼굴을 때리는 것 같이 비가 들이닥쳐서 피부가 아플 지경이었다. 엄마는 그때 일을 두고두고 내게 말하면서,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다신 배 안타는 트라우마를 남겨주고야 말았다. 가져간 대형 수건으로 겨우 얼굴 부분만 막고 제발, 제발 빨리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그 속도로 30분을 가야 하는 건 약간 고문이었다. 







재난 영화 하나 뚝딱일 것 같은 날씨다.


근처 섬에 도착하니, 난 무슨 재난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 미친 듯한 소나기,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배를 타는 곳에 바글바글 모여서 앉아있는 사람들. 스노클링은커녕 해수욕도 즐기기 힘들 만큼 깜깜한 하늘과 세찬 비였다. 엄마와 나는 고민 끝에, 그냥 다시 배를 타고 본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날씨가 이런 걸 알았을 텐데도 그대로 배 운항을 진행시킨 게 불만이라 돌아가서 내가 못한 활동들에 대한 환불도 받아냈다. 온몸은 쫄딱 젖었고, 그 몸이 덜컹거릴 정도로 거친 파도에서 한 시간 가량을 흔들렸던 여파로 너무 피로해진 우리는 그대로 호텔로 들어와 씻고 드러누웠다. 호텔에 누워 멍하니 비가 들이닥치는 밖을 지켜보고 있자니, 우울해졌다. 이게 무슨 휴양이야. 비의 감성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휴양지의 따사로운 햇살과 활기찬 특유의 분위기, 핑크빛 석양 등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실망감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 블로그글에서 엽서 같이 예쁜 사진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럽겠지만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


분명 여유 있는 여행을 하고 오자,라고 결심했건만 휴양지에서 비를 만나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택시 타고 나가서 잠시 백화점 쇼핑만 돌아다니거나, 블루 모스크를 보고 오는 것 정도. 리조트에서 늘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지!… 는 절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 재미없어. 마지막 날까지 비가 와서 석양이 비출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자, 눈물까지 나왔다. 엄마 앞이라 그냥 진짜로 울어버렸다.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 머나먼 아이슬란드 갔을 때에도 내내 비 오느라 오로라 한번 못 보고 왔는데. 그래도 그땐 이렇게까지 서럽지는 않았다. 뭔가 오로라는, 쉽게 볼 수 없을 거라고 약간 각오하고 갔으며, 성공할 때까지 도전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코타키나발루에서조차 하늘은 내게 석양을 허락지 않으니까 많이 서러웠던 거 같다. 오로라 못 보고 돌아온 사람은 봤어도 석양 못 보고 온 사람은 없을 거 같았는데. 해양 스포츠도, 해수욕도, 반딧불 투어도 못했다. 


싱가포르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1순위, 칠리크랩. 코타키나발루에서는 좀 유난히 달달했다.
꼬지요리 사테. 여기에 타이거 맥주까지 해야지 최고지.

그래도 여행에서 좋았던 기억을 꺼내보자면, 역시 먹을 것이 아닐까. 그런데 웃긴 건, 아무래도 같은 동남아다 보니까 비슷한 싱가포르의 음식이 많아서 그런 것 위주로 먹었더니 사실상 코타키나발루의 추억이 아닌 싱가포르의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같이 싱가포르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엄마와 같이 간 덕분에 뭘 먹어도 이건 싱가포르에서 먹는게 낫다 뭐 이런 류의 말만 했던 것 같다. 


해는 제 얼굴의 절반만 빼꼼 보여준다. 너무 실망하지 말라는 의미 같다.


마침내 비행기를 타러 가기 마지막 날. 아침에는 좀 맑아져서 나름의 희망을 품었는데, 저녁이 되니 또 엄청난 구름이 몰려온 덕분에 이 정도가 내가 볼 수 있었던 최선의 석양.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내내 서운하기만 했던 나를 위해 얼굴은 한번 내밀어주는 모양이었다. 구름 사이로 간신히 얼굴만 내민 햇빛을 뒤로한 채, 내 첫 휴양지의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안녕, 코타키나발루. 이것 밖에 건진 사진이 없어 특별히 두 장 넣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알던 네가 아냐 : 뉴미디어의 도시_싱가포르 2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