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슬픈 일이 있어도 별로 슬프지 않다. 사실 슬프지 않았으면 슬픈 일이 아닌 게 맞지만, 많은 사람들이 측은히 여기는 이야기였으니 슬픈 일이라고 얘기하겠다. 하여간 내가 자잘한 비극을 즐겁게 얘기할 수 있었던 건 슬픔에 대한 역치값이 높아서일 수도 있고, 그러한 사건들이 내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여서 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잔뜩 술에 취해 할 얘기 못 할 얘기 구분 못하고 떠들어대다 보면
'나 이런 일도 있었어! 흥미롭지 않아?'
라는 마음으로 옛날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체로 사람들이 대신 슬퍼해줬고 말하면서도 내가 괜히 울컥해지는 느낌을 받아서 더욱이 그랬다. 그러나 다들 그렇겠지만 술을 마시다 보면 기구한 인생이 많다는 걸 느낀다. 그러려니 공감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도 스토리에 자신감이 있었던 내게는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취해서 내뱉는 인생의 쓴 맛이 대체로 유년기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은 내가 학창 시절에 썼던 자기소개서를 보면 알 수 있다.
……평범한 얘기가 아닌, 오로지 나만의 이야기. 형무소에서 형을 치르고 나온 아버지와의 만남. 허리디스크로 장애인 판정을 받은 아버지가 수술 뒤에 한동안 절뚝거렸던, 아버지의 여자 친구가 내 목을 졸랐던 밤. 그런 아버지의 여자 친구를 보며 어머니가 참 예쁘시다며 부러워하던 친구. 내가 잊어버리면 어느 누구도 기억해 주지 못할 기억들이었다. 무턱대고 산 노트는 내 유년시절로 조금씩 채워져 갔다. 글을 쓰면서 웃을 일이 특별히 없다는 이유 때문에 더 씁쓸했던 것 같다.
사유하는 사유의 '입시 자기소개서' 中
별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면서, 이미 이십 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술자리에서 학창 시절 자기소개서에 썼던 얘기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나불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학창 시절에 노트에 일기를 쓰면서도 단 한번도 씁쓸한 적이 없었다. 하여간 나란 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구라야.
그래서 나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봤다. 내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유년시절에 있었던 일과 비슷한 일들이 또다시 내게 일어나거나, 두 번째는 지금의 삶을 이야깃거리로 만드는 거다.
대체로 학창 시절에는 특정한 사건이 내게 닥쳐오는 느낌이다. 그리고 내게 학창 시절은 내가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훨씬 적었을 때라,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처해진 상황을 고민할 시간이 넘쳐났고, 고민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항상 사건의 중심에 있고, 사건이 내 생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다 보니 닥친 일을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사건은 해결되는 대로 증발해버린다. 경험에 대한 사유는 없고, 닥쳐올 일에 대한 고민만 있다.
이제는 섬세함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 누군가 내게 극적인 사건을 던져주지도 않고 스스로 극적인 사건에 뛰어들 자신은 없으니 내일 당장 겪게 될 하루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뽑아내야 한다. 나는 내일의 나에게서 무엇이라도 배워야만 한다. 부장님의 업무지시에 한숨을 쉬는 옆자리 동료에게서 어떤 흥미로운 감정을 느끼고, 선배가 던져주는 수정사항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느낀 모든 것들을 나만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술자리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조금은 나이들 수 있다.
과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죄스러운 글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보고 욕이 쏟아져 나와도 할 말은 없다. 내가 죄인이다. 조금 더 코믹하고 황당한 이야깃거리로 내 술자리를 채워나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