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따라 종종 걸어오던 가벼워진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생각난다. 그 순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피고 지던 꽃 같은 것... 해서 사라진 인생의 환 하나를 새삼스레 떠올리는 기분이다. 그녀도 나도 열아홉 살이었다. 누구에게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시절이 있는 법이다.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中
인센스를 피우고, 꿈처럼 어둡지만, 그래서 모든 게 선명해지는 조명을 켜놓은 채 책을 읽다 보면 종종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마다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주인공의 선택에 탄식하다가도, 결국은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으로 사유는 흘러간다. 보통 옛 생각에 잠기면 미셸 공드리의 영화를 보면서 훌쩍이고 말지만, 와중에도 나 혼자 몽롱한 새벽에 갇혀 잠에 들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때가 종종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는 게 좋을까. 송충이를 괴롭히는 학우들에게 그만하라며 소리치던 짝꿍을 보러 갈까, 아니면 나를 괴롭히던 친구에게 크게 한 방 날리러 가볼까. 이런저런 순간들이 떠오르지만,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내가 사랑받았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말 그대로 사랑'받던' 순간. 내게는 사랑보다 감사로 가득했던 날들이었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업데이트된 지인들의 메신저 프로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하나씩 살펴보다 보면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대충 알게 되고, 전 애인이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 라고 했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새로운 인연을 만나거나, 결혼한 전 애인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있으면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낀다.
그녀는 나와 함께일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가도, 내가 없는 시간은 지독히도 외롭다 말했다. 그리고 즐겁게 술을 마시며 미래를 얘기할 때, 그곳에 내가 없으면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이미 떠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며 아무리 좋았다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 하더라도,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라며 이별을 고했을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만나자는 것도 아니고, 친구로라도 남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것 같은데, 나는 그들의 사랑을 응원할 수 없다. 마치 지나온 시간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만 같아 불안할 따름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길다면 길었을 사랑의 유예기간이 모두 지나버려 이제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제야 비로소 사랑의 감정이 분명해지는 게 아닐까. 완전한 사랑은 완전한 이별 이후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인센스에 불을 붙여본다. 향은 지독히도 내 주변을 맴돌다가, 그 짧은 생을 다하고 나면 벽지와 옷가지, 가구 이곳저곳에 들러붙어 잠시나마 불타올랐었다 말한 뒤 내게서 떠나갈 채비를 한다. 나는
향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다시 인센스에 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