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수연 Dec 17. 2016

불사조처럼 날아오를 낭만을 희구하며

<라 라 랜드>(LA LA LAND, 데이미언 셔젤)

영화 <라 라 랜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아티스트>와 <위플래쉬>에 대한 언급도 살-짝 있습니다.
영화 <아티스트> 스틸컷

영화사에서 일대 전환을 가져 온 역사적 사건은 단연 유성 영화의 등장일 것이다. 미셸 아자나비시우스의 영화 <아티스트>는 바로 이 전환기를 배경으로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가 유성 영화의 도래로 몰락의 위기에 놓인 이야기를 그린다. 장병원은 <아티스트>가 무성 영화의 역사를 재현만 하는 드라마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이행을 기계적 진화론적 관점으로 보며 무성 영화를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던 종래의 시각에 반대한다. <아티스트>는 "영화의 역사에서 무성의 형식과 유성의 형식이 충돌하고, 서로를 애증하며, 궁극에 변증법적 합일을 이루게 되었는가를 ‘장르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풀이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결론이 된 뮤지컬 형식은 "무성 영화의 행동주의"와 "유성 영화의 리얼리즘"이 화합한 변증법적 결과물이다. "무성의 형식은 행동주의와 스펙터클의 미학으로 죽지 않고 영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영화는 영화라는 예술의 두 가지 거대한 형식(사운드와 시각적 이미지)이 조화롭게, 그러나 둘 다 양보 없이 나서는, 가장 화합적이며 부자연스러운 장르다. 모순적이나, 어쨌든 이것은 영화의 두 형식을 전면으로 느끼게 한다. 기본이 유성 영화가 되어버린 시대에 배우의 행동으로 대표되는 시각적 이미지는 사운드에 제한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 두 가지 요소가 모두 극대화된 뮤지컬의 순간은 언제나 이질적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스크린의 경계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느끼고 있다는 그 자체를 환기 시킨다.

따라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라 라 랜드>의 이야기를 뮤지컬 영화로 만든 것은, 감독이 본래 음악에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정보와는 별개로 의미심장하다. <라 라 랜드>는 결국 영화 예술의 존재 기반에 대해 향수함으로써 영화 예술을 있는 힘껏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극 중에서 주인공 미아는 자신의 1인극을 직접 쓰고 연출한 중간 결과물을 연인 세바스찬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주저한다. "너무 향수적이야." 그러자 세바스찬은 기운을 북돋는다. "그게 핵심이야!"

그 대사처럼 <라 라 랜드>는 시작부터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알리며 가로로 쭉 벌어진다. 영화는 주로 5-60년대 뮤지컬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듯 보인다. 두 주인공 미아와 세바스찬이 추는 춤은 <사랑은 비를 타고>를 위시로 한 당대 고전 뮤지컬 영화에서 주로 나온 탭댄스와 왈츠다. 또 미아와 세바스찬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본격적인 계기가 된 그 장면, 파티에서 나와 한적한 길을 거닐다가 이내 낭만적인 춤을 추는 그 모습은 <밴드 웨건>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된다. 데이미언 셔젤은 일찍이 그에게 있어 "<쉘부르의 우산>을 뛰어 넘는 '조형적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라 라 랜드>에서 미아가 직접 쓴 대본에 실린 등장인물의 이름이 "쥬느뷔에브"라던가, 두 연인이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난 겨울(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우연히 다시 재회하는 설정은 <쉘부르의 우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혹은 이 <라 라 랜드>의 결말은 영화 내에서도 언급된 <카사블랑카>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여자가 자신의 남편과 함께 우연히 들어간 술집이 옛 연인이 운영하는 가게였다는 것과 특정한 음악에 옛 연인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말이다.

고전을 향수하는 <라 라 랜드>는 이야기와 플롯 또한 예외로 놓지 않는다. 그것들 역시 상투적이고 뻔하다. 영화 <아티스트>가 "지극히 표준적인 로맨스 플롯 안에 치밀한 방식으로 영화사의 역사적 전환기를 알레고리화 한다."고 했던 장병원의 표현을 빌리면, <라 라 랜드> 역시 지극히 표준적인 로맨스 플롯 안에 치밀한 방식으로 현 시대에 위기에 놓인 영화의 토대를 알레고리화 한다. 그러므로 우연성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이야기 진행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각각의 이야기 내면의 짜임이다. '두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다>우연히 사랑에 빠지다>어떤 계기로 헤어지다>우연히 재회하다'의 흐름보다 '사랑에 빠지다'나 '재회하다' 등의 각각의 이야기가 어떻게 묘사되고 조직되어 형성되었는 지가 중요하다.

그들의 로맨스는 실제 우리네 연애가 그러하듯 낭만과 현실을 시종일관 왔다갔다 한다. 그들이 파티에서 나와 밤 길을 거닐다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순간은 온전히 낭만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 영역의 연장선에서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를 때, 미아의 남자친구 그렉의 전화가 온다. 갑자기 현실의 영역이 침범하는 것이다. 미아와 세바스찬이 정식적으로 첫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어떠한가. 극장에서 <이유없는 반항>을 보던 그 둘은 서로의 손을 잡을 듯 말 듯 하다가 이내 포개고 키스를 하려는데, 갑자기 영화 상영이 중단된다. 또 다시 서로 간의 낭만이 지극히 현실적인 무언가로 깨어져 버리는 순간이다. (이는 앞으로 두 주인공의 관계에 대한 미래를 함축적으로 암시하는 장면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는 두 주인공이 <이유없는 반항>에서 등장하는 그리피스 천문대를 직접 가는데, 그 곳에서 주인공들은 다시 키스를 시도하지만 손수건이 날리며 방해된다. 그러다 이들의 낭만이 기어코 성사되는 부분은 공중 위로 날아 올라 우주를 배경으로 춤을 춘 비현실적인 환상 속이다.

영화에서는 두 주인공의 연애가 낭만과 현실의 줄다리기에서 낭만의 영역으로 기울어질 때, 그것을 뮤지컬의 형식으로 채운다. <라 라 랜드>의 세계는 낡은 것을 좇는 것을 낭만이라 부르고, 그 낭만을 조롱하는 시공간이다. 고지서는 잔뜩 밀려 있는 주제에 돈벌이도 안 되는 재즈 음악에 여전한 고집을 피우는 세바스찬을 향해 누나는 "미납 청구서는 로맨틱하지 않아"라며 그의 낭만을 현실의 구석으로 몰아 붙인다. 미아의 남자친구와 그의 형은 "극장은 냄새 나고 더러운 곳"이라고 하고, 55년 작 <이유없는 반항>을 상영하던 그 "냄새 나고 더러운" 리알토 극장은 폐쇄에 이른다. 세바스찬의 음악 학교 동창인 키이스는 재즈와 전자 음악의 결합에 당황한 그에게 말한다. "전통만 추구하면 혁명가가 될 수 없어." 이런 맥락에서 영화가 두 주인공의 이별을 결말로 선택한 것은 그 둘의 연애에서 낭만의 영역이 제거됨을 의미하고, 이건 그 자체로 낭만을 조롱하고 급기야 위협하는 지금의 시대를 상징한다. 결국 <라 라 랜드>가 훌쩍 지난 5-60년대 뮤지컬의 자취를 다시금 새기면서도, 뮤지컬로 채웠던 두 주인공의 낭만의 영역을 깨어버리는 모순된 선택을 한 것은, "LA는 모든 것을 숭배하지만 어느 하나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세바스찬의 말처럼 그런 풍조를 그려냄과 동시에 그 낡고 뒤처진 어느 하나를 소중히 여기기 위함이다. 전통만 추구하면 혁명가가 될 수 없을지언정, 전통을 망각하면 "삼바와 타파스"와 같은 조악한 결과물을 낳을 뿐이니까.

영화 <위플래쉬> 스틸컷

데이미언 셔젤은 "삶과 예술의 균형, 현실과 꿈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는 그러한 균형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한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지는 과정의 영화다.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에서 앤드류가 드러머로서 예술혼을 불태우는 것은 그래서 처량하다. 앤드류와 플렛처의 기괴한 눈맞춤보다 앤드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그의 아버지의 표정에 이입이 되는 것은 그런 이유다. <라 라 랜드>의 결말 또한, 주인공의 사랑은 실패하고 각자의 꿈은 성공했다는 점에서 현실과 꿈이 균형을 이루는 데에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그러한가?


매번 오디션에 탈락하는 무명배우였던 미아는 스타 배우가 되었고, 이제는 노인들만 겨우 즐겨 듣는 재즈 음악을 고집하던 세바스찬은 자신의 그 고집을 이어갈 재즈 클럽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둘의 성공에는 서로 간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아가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제때 움직이지 못할 때, 자신의 자동차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할 때, 세바스찬은 클랙슨을 울리거나 자동차를 쉽게 찾는 해법을 알려준다. 또한 미아가 캐스팅이 된 계기인 1인극은 세바스찬의 아이디어였다. 세바스찬 역시, 자신의 재즈 클럽의 이름을 존경하는 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와 연관지어 "치킨 꼬치"라고 정할 때, 미아는 "셉스"라는 이름을 제시한다. 이는 세바스찬의 다소 지나친 고집이 지금의 시대와 좀더 어우러지길 바라는 마음의 발로다. "저 군중 속의 누군가가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널 데려가 줄거야."라는 노랫말처럼 둘은 서로에게 그런 '누군가'가 되었다. 그리고 각자의 꿈이 이루어질 발판이 마련될 무렵, 그 둘의 표면적 관계는 "우리는 어디쯤 있는 거야?"라고 물을 정도로 멀어져 보이나, 이내 서로에게 다짐한다. "언제나 사랑할 거야." 그들의 연애는 끝났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결국 <라 라 랜드>의 마지막 시퀀스는 <아티스트>의 결론처럼 부딪히는 두 가지 요소의 '변증법적 결과물'이다. 먼저, 미아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재즈 클럽에 가게 되는데, 사실 그 재즈 클럽은 세바스찬이 운영하는 "셉스"였다는 '현실'의 안타까움이 그려진다. 그리고 세바스찬이 미아와의 추억이 깃든 그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되는데, 이 때의 장면은 현실의 벽이 제거된 온통 '낭만'으로 가득찬 둘의 연애가 그려진다. 이윽고 다시 돌아 온 현실. 미아와 세바스찬은 눈을 마주치고 서로에게 안타깝거나 슬픈 얼굴이 아닌 미소로써 화답한다. 그 미소는 아마 지금의 너와 나는 낭만의 미학이 "죽지 않고 영속"하기에 이 현실에 발을 딛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다. 다시 영화 초반부로 돌아가자. "로맨틱이란 말을 나쁜 말처럼 쓰는" 세바스찬의 누나가 있다. 그 때 세바스찬은 주눅 들지 않고 이렇게 외쳤다.


"불사조처럼 날아오를 거야!"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