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우민호)과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드니 빌뇌브)
영화 <내부자들>과 <시카리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2015년 12월 9일에 썼던 글입니다.
한국영화 <내부자들>과 미국영화 <시카리오>는 (근원적 속성은 '악'이라는 측면에서 같으나) 개념상 다른 의미의 카르텔 세계를 각자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부연하자면, <내부자들>은 정치-기업-언론의 권력 카르텔을, <시카리오>는 중남미 일대의 거대 마약 조직인 카르텔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두 영화는 카르텔의 세계를 짜는 이른바 설계자를 내세운다. <내부자들>의 언론사 논설위원 이강희와 <시카리오>의 CIA소속 팀장 맷이 바로 그 설계자다.
그러나 두 영화의 설계자들은 각자의 설계의 목적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이강희는 자신의 기득권을 위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목적을 두고 있는 데 반하여 맷은 마약 조직을 통제하기 위하여 지극히 공적인 차원에서 폭력의 세계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세계는 완전히 다른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전자는 누군가에 의한 처단의 '대상'이 되고, 후자는 대상을 처단하는 '누군가'가 된다. 그리하여 이강희와 맷의 폭력의 세계는 각기 다른 목적에서 다른 형태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으로 절대악과 필요악의 경계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강희가 만든 권력의 카르텔은 절대악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카르텔 외부에 있는 자들을 개, 돼지 취급한다. 그리고 청렴한 검사로 나오는 우장훈은 이강희가 만든 절대악의 세계를 처단하는 자이다. 그는 조폭의 신분인 안상구라는 필요악을 이용하여(또는 서로 협력하여) 절대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처단한다. 그리고 <내부자들>에서 나타난 이 성공은 절대악과 필요악의 사이가 상당 부분 거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반면, 맷이 작동시키는 카르텔은 필요악이다. 이미 중남미의 카르텔은 국가라는 공권력이 통하지 않는 절대악의 조직이다. 특히 멕시코의 후아레즈는 무법천지의 지옥이다. 마치 살육이 파티처럼 신나게 행해지는, 그래서 총소리가 폭죽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리는 것이 당연한 끔찍한 공간이다. 게다가 중남미의 카르텔은 이미 미국의 중심부까지 파고든지 오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절대악을 근절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카르텔을 미국의 손 안에서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마약 조직은 살려두고 미국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조직만 처단하는 것이다. 처단의 방식은 불법이어도 상관없다. 최선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질서 유지는 가능하게 되니 이쯤되면 이 폭력의 세계는 절대악에서 필요한 악이 되는 것이다.
맷의 논리는 그럴듯하다. 아니 유일한 해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필요악이 절대악을 낳는 과정을 보았고, 그로 인해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대표적인 것이 몇주 전 발생한 '파리 테러'이다. 911테러 이후 부시 정권에서 이루어진 이라크 전쟁이라는 필요악은 지금의 절대악으로 상징되는 이슬람 국가를 만들었다. IS의 탄생의 뒷배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이 있다. 절대악과 필요악의 거리가 너무나도 가까워져, 그 경계가 모호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파리 테러와 같은 참상을 여러 번 겪었다. <내부자들>과 같은 통쾌한 성공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카리오>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 장면에는 멕시코 최대 마약 조직의 보스가 죽고 난 후 평화롭게 축구 경기을 하고 있는 아이들과 가족들, 그러나 그 잠깐의 평화는 깨져버리고 또 다시 들려오는 살육의 소리, 그러나 이내 그 소리가 익숙하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과 그의 가족들이 그려진다. 이러한 그들의 표정에서 우리는, 그동안 절대악과 필요악의 경계에 대하여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IS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대하여 세계3차대전이라는 전인류의 재앙을 너무 쉽게 떠올린 것은 아닌지 성찰할 지점을 찾아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