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수연 Dec 20. 2016

숨이 붙어 있는 한 싸워라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영화 <레버넌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해가 지나가는 것은 늘 아쉽지만, 그 아쉬움을 위로해 주는 것이 있다면, 연초에 줄 지어 개봉하는 아카데미발 영화들이 아닌가 합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기다리며,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핫했다고 볼 수 있는, 드디어 디카프리오에게 오스카를 안겨 주었던 <레버넌트>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지난 1월 22일에 쓴 글입니다.


이냐리투는 <버드맨>에서 오직 타인의 사랑에만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삶을 맞춰가려는 인간에게 '무지의 예기치 못한 미덕'으로 위로를 건넨 바 있다. 자살시도를 하니 오히려 대중과 평단의 사랑이 돌아오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바로 인생 아니겠냐고 익살맞게 설파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제, 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가지고 진지한 실험에 돌입한 것 같다. <버드맨>에서는 인생의 작동원리를 다루었다면, <레버넌트>에서는 인생에 대하여 논하기 이전의 것, 즉 '살아 숨 쉬는 것'에 대하여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버넌트>는 주인공 휴 글래스를 백인이지만 인디언의 정신을 가진, 경계에 걸쳐진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게다가 첫 시퀀스는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지운 채 본다면, 인디언과 백인들 중 누가 선이고 악인지를 가늠할 수 없다. 오히려 주인공이 속한 백인 집단을 무차별하게 공격하는 인디언 부족이 나쁘게 보일 수도 있다. 싸움이 끝난 시점에 이르러서 그들이 자신의 터전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채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일 때에 비로소 이들도 피해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인들에게 가서 거래를 하는 인디언의 모습은 어떠한가. 인디언은 자연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실제로 서부개척시대에 시애틀의 한 인디언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는 하늘이 잠시 빌려 준 이 땅을 매매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인디언에게 대지는 어머니이고, 사냥은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정도만 허용된다. 그러한 자연관을 가진 인디언이 동물의 가죽으로 총과 말을 얻어내는 행위는, 인디언을 자연을 문명이라는 미명하에 개발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백인과 동일선상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한편 휴 글래스가 회색곰에게 사정없이 공격 당하여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설정 또한,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한 동물과 이성이 존재하는 인간을 동일시 여기는 것이다. 회색곰이 글래스를 공격하는 이유와 글래스가 피츠제럴드에게 복수하는 이유, 그리고 아리카라족이 백인들에게 복수하려는 이유가 모두 같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식을 지키거나 자식을 잃거나 자식을 되찾기 위해서 복수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레버넌트>는 거대한 자연 속에 놓인 세 존재(문명인-야만인-짐승)를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은 채 중립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마치 자연이 그 세 존재를 관망하듯 말이다. 결국 이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세 존재들이 광활한 자연에서 태어난, 자연의 일부분인 것을 말해준다. 글래스가 네 번의 죽음의 위기에서 각기 흙, 물, 나무(집), 동물의 몸통 속에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인간의 생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회귀한다. 삶과 죽음은 눈이 오고 녹는 과정처럼 자연의 순환이다. 무릇 자연이 그러하듯이 삶과 죽음을 경계짓지 않은 채 살아가는 인간은 자연의 품 안에 존재하는 일부분일지라도 자신만의 고귀한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다. 어떠한 시련에도 끝까지 살아남는 강인한 정신을 말이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을 죽이려 온 글래스에게 그깟 복수를 하러 왔냐고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피츠제럴드는 자연에서 기인한 생의 근원을 모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그는 오로지 돈으로 점철된 명목상의 삶만 좇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삶을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글래스에게 그의 비아냥은 어떠한 상처도 되지 않는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싸워라." 이것은 마치 영화 상영 내내 들리는 주문과 같은 메시지이다. 2014년 4월 수많은 아이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이후, 우리는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유가족들의 필사의 투쟁을 보았다. 많은 이들이 지겹다고 했고 노란 리본만 봐도 역겹다고 했다. 다른 많은 이들은 이제 무감각해졌고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레버넌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글래스가 영화 밖 관객과 눈을 마주칠 때, 이러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는 과연 제대로, 사력을 다해서 살아 숨 쉬고 있는가. 그리고 다짐했다. 언젠가 당당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기 위하여 카메라에 뿌옇게 낀 그의 '숨'을 항상 기억하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절대악과 필요악의 경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