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트풀8>(The Hateful Eight,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헤이트풀8>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란티노 감독이 이제 10번째 영화를 내놓게 된다면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했지요. 그의 신작을 늘 기대하며 기다리지만, 한편으로는 신작이 최대한 늦게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참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헤이트풀8>은 그의 8번째 장편 영화이고, 앞으로도 추운 겨울이 될 때마다 떠오를 영화입니다.
지난 1월 11일에 쓴 글입니다.
알다시피 타란티노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을 시작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연이어 선 보인 <바스터즈>와 <장고 : 분노의 추적자>(이하 <장고>)에서 그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역사상 가장 최악의 만행에 아주 통쾌한 복수를 했다. 흔히 그는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이 별명은 그의 복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는지 느끼게 해준다. 사실 이 아이러니한 두 단어의 조합은 타란티노만의 극대화된 폭력성에 낭만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굳이 <바스터즈>에서 사랑하는 두 남녀가 나치에게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장고>에서 주인공 장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남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낭만적인 코드는 타란티노가 인간이 인간을 혐오하던 역사에서 그 혐오를 혐오로써 되갚았던 이유가 인간과 인간이 사랑하길 그 누구보다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최신작 <헤이트풀8>은 그 제목과는 정반대로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정면에 외치는 영화다.
증오의 8인 정도로 해석하면 좋을까. 어쨌든 이 영화는 등장인물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총을 겨누고 겁을 주고 협박한다. 그 중심에는 흑인 마커스가 있다. 그는 나머지 백인들 사이에서 가장 미움과 멸시를 받는 인물이다. 남북전쟁 이후로 흑인 노예제가 폐지되었음에도 백인들은 말끝마다 니그로를 붙이며 마커스를 무시하기 일수다. 게다가 영화가 절정에 이르러 서스펜스를 극도로 몰아붙이는 건 마커스와 어쩔 수 없이 같은 편이 된 크리스를 유혹하는 반대편 데이지의 '흑인을 죽이고 나와 편이 되자'는 제안이다. 이 마커스는 남북전쟁 발발 이전 시대를 그린 <장고>에서 장고의 훗날 모습으로 보인다. 어느 독일인의 보살핌으로 현상금 사냥꾼으로 길러진 장고가 백인들에게 복수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행복하게 살다가 남북전쟁이 터져 군인으로 참전하며 또 백인들을 죽이고 전쟁 후 다시 현상금 사냥꾼으로 돌아와 노예제가 폐지된 환경에서 떳떳하게 사는 모습으로 말이다. 이러한 장고와 마커스의 연결은 그가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 피터지는 싸움을 하고 승리를 쟁취하였음에도 차별과 증오가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하나의 큰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세상이 작동하는 원칙이 바뀌었음에도, 즉 시대가 변했음에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증오가 여전하다는 것을 장고와 마커스의 연결로 보여주는 것이다. 비단 남북전쟁 전후 시대만이 아닌, 인간의 평등과 자유에 대한 가치가 가장 발전하고 보호받는 오늘날까지 여전하다고 말이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암담한 상황을 '백색지옥'으로 표현한다.(마지막 챕터의 제목이 Black man, White Hell이다.) 백색지옥은 상당히 중의적인 표현이다. 이 희비극은 서부극을 표방하는 듯 하지만 황량한 모래 사막도 아닌 설원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이 공간은 말그대로 백색지옥인 것이다. 한편 이것은 흑인을 혐오하는 백인들로 구성되어 흑인이 보기에 아주 지옥같은 세상을 지칭한다. 그리고 나아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증오의 역사 그 자체를 가리킨다.
<헤이트풀8>의 마지막 시퀀스는 유난히 마커스를 싫어하던 크리스가 그와 손을 잡고 현상금 수배자 데이지를 직접 처형한 후, 링컨의 가짜 편지를 읽으며 함께 웃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눈으로 뒤덮인 그곳에는 여전히 앙상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처연하게 있다. 그들의 웃음은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결국엔 서로를 미워하던 이들이 화해를 맺는 행복한 웃음일까, 아니면 인간은 생사를 오가는 극단의 상황에 이르러서야 손을 잡는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확인한 조소일까. 어느 것이든 한가지는 확실하다. 타란티노의 희망, 그러니까 그가 바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다. 증오의 역사에서 사랑의 역사로 나아가는 것. 타란티노가 연달아 이어진 두 편의 역사적 복수극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저수지의 개들>을 레퍼런스하여 <장고>의 뒷 이야기를 그린 것은, 어쩌면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아주었던 자신의 방식을 경계하고자 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