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매
사람이 하는 일이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면 언니와 내가 스튜디오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이였다. 두 사람이 만나 메뉴 하나 고르기도 어려운시대에 우리 안에 어떤 마음이 동하여 그렇게 모든 결정이 순식간에 내려지고, 겁 없이 무모하고, 서로를 믿게 되었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다. 현실적으론 없는 게 있는 것보다 많았고 사업이라 하기엔 허술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때 우리에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좋은 점들이 많았으니 그것 중 하나는 젊은이더라.
텍스타일 스튜디오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는 프린트 전문 스튜디오를 꾸렸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디자인팀에서 올 시즌은 꽃무늬가 필요하다!라고 결정되면 우리 같은 프린트 스튜디오나 빈티지 프린트들을 수집하는 전문 벤더에서 그 시즌에 맞는 콘셉트로 바잉을 한다. 물론 회사 안에 자체적으로 프린트를 디자인을 하는 곳도 있고, 그럴만한 인프라가 없는 회사들도 있고, 필요에 따라 바잉 한 디자인과 자체 디자인을 함께 쓰는 곳도 있다. 우리는 거의 수작업이었기 때문에 디자인만 팔았고 더 규모가 있는 프린트 스튜디오들은 추가 비용으로 스케일, 칼라웨이를 만들 수 있게 파일 보정, 리핏 보정까지 해주기도 한다.
우리의 하루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오전에는 말씀과 기도, 회의, 점심 먹은 후, 프린트 디자인 작업. 이 하루들이 쌓여 충분한 프린트 디자인이 모이면 우리는 PRINT SOURCE 나 PREMIERE VISION 같은 곳에 가서 진열하고 클라이언트들을 만났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트렌드를 읽고, 주제를 가지고 프린트들을 디자인했다. 클라이언트들은 보통은 의류나 인테리어 회사였고 그래서 주로 옷이나 침구류에 우리 패턴들을 썼다. 시작하는 스튜디오 치고 WEST ELM, ANTHROPOLOGIE 같은 꽤 굵직굵직한 손님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 년 정도밖에 버티지 못했다. 돌아보면 사업이라고 하기엔 아침엔 기도원, 오후엔 미술치료 같았고 우리의 시간 분배를 보면 일 년 버틴 것도 기적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난 냉철하게 하나의 사업으로서 분석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언니는 비자 문제 때문에 다시 한국에 들어가야 했고 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 어느 회사든 들어가서 일을 배워 나중에 언니랑 다시 한번 해보자! (회사를 들어가는 이야기는 다음 화에)
10년이란 세월에 잊힐 뻔했지만 그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지금 하고 싶은 것과 꽤 일맥상통한다. 시스템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싶고, 내가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들과 일하고 싶고, 또 주체적인 디자인을 하고 싶다. 그렇게 살았을 땐 충분한 돈을 벌지 못했고 지금은 저걸 못하지만 돈은 번다. 이 두 가지 경험이 만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난 이제 너무 많은 걸 알게 되어 두려운 게 많아졌고 책임질 사람들이 생겨 아이러니하게도 10년 전 내게서 빌려오고 싶은 건 무식함이다.
번외:
언니에 대하여...
이자매 스튜디오는 언니를 빼고서는 설명이 안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면 얼굴이 생각나고 또 어떤 사람은 전체적인 실루엣이 생각나고 어떤 사람은 입은 옷의 디테일이 생각난다면 언니는 얼굴과 목소리가 같이 생각난다.
언니의 목소리는 정말 예쁘다. 말투가 예쁜 건가? 예쁜 말을 하는 건가? 다 이쁜 건가?
세월이 지나니 언니가 얼마나 넓은 마음으로 나를 끌어안아 줬는지 느껴진다.
언니의 추진력과 긍정의 말, 배려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 년이었다.
난 가끔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머리에 둥지를 트는 날들이 있는데 그럴 때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심플하게 생각해!’
#친자매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