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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Aug 11. 2021

영화 리뷰 <블러드 스크린>

평화롭던 극장에 나타난 살인마, 그의 '끔찍한' 규칙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 위치한 오래된 극장에서 상영하는 <프랑켄슈타인: 데이 오브 더 비스트>을 보기 위해 술에 취한 10대 무리, 처음 데이트를 하는 커플, 몰래 들어온 소년,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혼자 온 여인 등 관객이 하나둘 모인다. 


몸이 편찮은 영사기사는 딸 아나(루시아나 그라소 분)에게 마지막 회의 영사를 맡긴 채 집으로 가고 소수의 관객이 자리한 가운데 상영이 시작된다. 그런데 사이코 연쇄살인마(리카르도 이슬라스 분)가 나타나면서 평화롭던 극장은 순식간에 살육의 장으로 변한다.


미국, 영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호러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반면에 우루과이의 호러는 낯설다. 근래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된 우루과이 호러물로는 <사일런트 하우스>(2010)가 유일할 정도다. 


<블러드 스크린>은 우루과이산 슬래셔 무비(살인마가 여러 희생자들을 덮친다는 내용의 공포 영화)다. 설정은 간단하다. (<데몬스>(1985)를 연상케 하는) 갇힌 극장 안에서 몇 명의 관객이 살인마에게 쫓긴다는 내용이 전부다. 1차원에 가까운 캐릭터가 주로 등장하는 슬래셔 무비답게 살인마가 어떤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는지, 그에게 쫓기는 인물들의 배경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슬래셔 무비의 규칙인 '피에 굶주린 살인마'와 '신체를 난도질하는 잔혹한 묘사'에 충실할 따름이다. 



<블러드 스크린>은 단순한 슬래셔 무비가 아닌, 한 편의 러브 레터에 가깝다. 1960~1980년대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지알로(화려한 이미지와 자극적인 살인 장면을 특징으로 하는 이탈리아 공포영화 장르)와 1970~1990년대 할리우드 슬래셔 무비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검은 옷을 입고 가죽 장갑을 낀 칼을 든 살인마, 강렬한 원색 사용과 조명 등 지알로의 특징과 슬래셔 무비의 장르 규칙이 결합한 모양새다. 극장의 복도엔 지알로를 대표하는 감독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오페라>(1987)가 걸려있다. 영화 음악은 그 시절 유행하던 신디사이저를 사용했다. 마치 그 시절에 만든 공포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블러드 스크린>은 과거 유행한 장르에 바치는 존경이면서 동시에 예전 극장 문화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블러드 스크린>은 오늘날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근사하게 되살렸다. 영화 속 무대인 오페라 극장(영화는 1993년엔 '누에보 18', 지금은 '시네마티카 18'이라 불리는 극장에서 촬영했다)은 스크래치 가득한 필름, 낡고 불편한 의자 같은 멀티플렉스 이전의 극장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정된 좌석이 없고, 담배를 피우는 관객도 보인다. 이것은 과거 우리나라의 재개봉관에서도 흔히 보던 풍경이기도 하다.


<블러드 스크린>은 슬래셔 무비의 공식을 활용하되 재미있는 영화적 장난도 쳤다. 극 중에 상영되는 <프랑켄슈타인: 데이 오브 더 비스트>를 실제 2011년 우루과이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살인마 역할은 <프랑켄슈타인: 데이 오브 더 비스트>를 연출한 리카르도 이슬라스 감독아 분했다.


그런데 살인마가 관객을 죽이는 순서가 재미있다. 살인마는 영화에 몰입하지 않고 딴짓을 하거나 들락거리는 관객을 먼저 죽인다. 마치 자기 영화에 집중하지 않는 관객을 감독이 응징하는 듯하다. 참고로 <프랑켄슈타인: 데이 오브 더 비스트>는 IMDB의 평점 3.7을 기록했다. 



<블러드 스크린>은 장르, 극장에 이어 호러 영화에 대한 메타 비평 가능도 한다. 영화 속에서 살인마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안구에 집착한다. 사람을 죽인 후에 안구를 적출하고, 심지어 먹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런데 안구는 공포 영화를 즐기는 행위와 연결된다. 극 중에서 소년 토마스는 극장에 몰래 들어가 공포 영화를 감상하고 살인마의 행각을 못 보게 가려주는 아나의 손을 피하기도 한다. 그의 행동은 피와 폭력에 불건전하게 매혹당하는 인간의 호기심을 반영하고 있다.


공포 영화를 보는 관객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처럼 만들어진 '호러 영화'로 욕구를 충족한다. 극 중 관객들처럼 말이다. 일부의 주장처럼 호러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이 현실에서도 피와 폭력을 갈망한다고 생각해선 절대 안 된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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