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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커가 가진 세 가지 무기

T1을 응원하는 여름을 보내며

by 김안녕


요즘 한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T1의 미드라이너이자 e스포츠 롤 계의 전설 페이커. 너무나도 유명한 분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텐데.


최고를 기꺼이 내려놓는 승부사, 페이커


올해 나는 e스포츠에 흠뻑 빠져들었다. 단순히 게임의 재미보다는 T1이라는 팀이 고유하게 키워온 멋진 서사에 감겼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한국은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한 e스포츠 강국이다. 그 안에서 T1은 201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국내, 나아가 세계적 강팀이다.


다만, T1은 이름처럼 늘 1등은 아닌 팀이다. 어떤 여름 시즌에는 지나치게 많이 져서(?) '이제는 정말로 T1이 끝난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암흑기를 보내기도 한다. 때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성적과는 반대로, T1은 e스포츠 계에서 가장 공고한, 흔들리지 않는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어쩌면 항상 잘하지는 않아 늘 마음을 졸이게 만드는 도파민이 동력이려나.


신기하게도 롤 경기에 관심을 두며 나 역시도 어쩔 수가 없이, T1의 팬이 되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전설적인 선수, 페이커 때문이다. 그가 잘해서는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애쓰지 않음이, 부족한 부분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반성하는 태도가, 크고 작은 경기 모두에서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 배우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그를 수식하는 '전설'이라는 단어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과는 별개로, 페이커에게는 '예전 폼 같지 않다. 사실상 프로 미드라이너 중에서 더 이상 탑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따라다닌 지 꽤 오래되었다. 대부분의 e스포츠 프로 선수의 전성기가 20대 초반인 것을 감안하면, 20대 후반인 페이커의 나이는 이미 물리적인 부분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페이커에게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희생하는 플레이. 미끼가 되어 적을 죽이기 쉬운 환경으로 끌어들이거나 상대 챔피언의 궁극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팀원들이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둘째, 드물지만 결정적인 순간 오직 페이커만이 볼 수 있는 어떤 각. 일명 '내가 넘겨줄게' 대사로 유명한 페이커의 아지르 토스는 사실상 패배를 향해 가는 가운데, 극적인 역전을 만들어내며 2023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가져다주었다.


셋째, 프로다운 태도. 롤은 모든 경기가 끝나면 승자 팀, 패자 팀 할 것 없이 모두 언론 인터뷰를 진행한다. 지고 나면 인터뷰할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을 텐데, 페이커는 끝까지 태도를 유지하려 한다. 경기를 차분히 리뷰하며, 본인이 부족했던 점에 대한 스스로의 피드백도 가감 없이 전한다. 언론 인터뷰뿐 아니라, T1 유튜브에서 공식으로 업로드하는 비하인드 영상에서도, 어렵고 어두운 분위기에서도 어떻게든 말을 꺼내 상황을 정리하려 하는 페이커의 모습이 종종 비칠 때가 있다.


2029년까지, 4년의 재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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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1은 올해 페이커와 4년 재계약을 진행했다. 페이커의 나이를 감안하면 4년은 정말 파격적인 조건이다. 페이커는 e스포츠계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한 선수다. 때문에 이런저런 여러 이유를 드는 사람도 많지만, 실력 없이는 불가능한 프로의 세계에서 페이커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자리했을 거라 생각한다.


실력을 갖춘다는 것. 프로다운 신뢰를 보여주는 것. 결정적인 순간 증명해 내는 것. 페이커가 가진 세 가지 키는 팀을 성공으로 이끄는 핵심일 것이다.


'최고 플레이어'인 자신을 자만하여 뽐내거나, 영원히 1등이 아닌 것을 못 견뎌 내려오지 못하거나, 일희일비하지 않고 담담하게 팀에 맞춘 플레이를 해내는 일.


승패를 가로 짓는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 그 누구도 여유를 갖기 어려운 절체절명의 위기에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각으로 팀을 이끄는 일.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순간에도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일. 페이커가 한 선수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가 도저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너무 무겁지 않기만을 바랄 뿐.



페이커의 태도를 배우고 싶다.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페이커가 했던 말과 행동을 되새겨보며 오늘을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해 본다.




"저는 순간의 좌절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일어서면 지금의 실패는

성공의 전 단계가 되기 때문에

도망칠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길은 저를 통합니다."


T1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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