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라이즈, 선셋, 미드나잇
(스포주의)
영화를 보며 인물이나 배경, 상황 설정 등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을 한 번이라도 마주한다면, 대게 그 영화는 주기적으로 계속 찾게 된다. 이러한 영화가 소위 인생 영화라며 회자되곤 하는데, 나에게도 유독 등장 인물에게 듬뿍 정이 들어버린 인생 영화가 있다. 바로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약칭 비포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의 매력은 단연코 '대화'에 있다. 영화 속 제시와 셀린느는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그 방대한 대화들은 두 남녀를 매력이 뚝뚝 묻어나는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들은 기차에서 만난 첫날부터 왼종일 낯선 빈의 거리를 거닐며 이별 열차에 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서로에게 서로를 표현한다.(비포 선라이즈) 9년 만에 파리에서 필연적으로 재회한 그들은 마치 처음 본 그 날처럼 쉬지않고 각자의 현재를 공유하며 서로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비포 선셋) 그들은 가족이 되었고, 9년을 함께 산 어느 날 그리스의 잔잔한 하루를 함께 보낸다.(비포 미드나잇)
시리즈를 모두 지나온 후에는 제시와 셀린느가 스마트폰 암호패턴만큼이나 익숙해져 있다. 나에게 이 시리즈의 백미는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조금씩 변하는 제시-셀린느 커플을 관찰하고 공감하는 부분이다. 처음 만난 빈에서 그들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23살은 뜨겁지만 연약한 나이이기에 꿈같은 하루를 함께 보냈음에도 찰나의 용기를 내지 못해 9년의 시간을 아쉬워했다. 9년 만에 재회한 32살의 그들은 분명 달라져 있다. 여전히 울고 웃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한쌍이지만, 이제는 비행기 이륙 시간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차 출발 시간에도 발을 동동 구르던 그들로선 커다란 성장이 아닐 수 없다.(심지어 이 시기의 그들은 비행기 시간보다 더 큰 현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다시 9년이 흘러 그들은 인형같은 쌍둥이 딸을 둔 41살의 부부가 되었다. 이제는 중년의 히스테릭한 부분까지도 서로에게 가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여전히 담담하고 솔직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드라마는 현실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하며 시리즈는 마무리된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퀀스는 두 번째 영화 비포 선셋의 세느 강 위 선상의 대화이다. 사실 그들은 9년 전 이별 기차를 타기 직전, 6개월 후 빈에서의 재회를 약속했다. 하지만 여느 멜로 영화가 그렇듯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채 9년이 흘렀다. 제시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셀린느의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진심으로 아쉬워한다. 셀린느 역시 자신이 그 날의 약속을 어김으로써 그 아쉬움의 여운이 얼마나 깊었는지, 오래갔는지를 갑판에 기대어 담담히 풀어낸다. 그들의 아쉬움이 세느 강에 비친 햇살 속에서 묘하게 아름답다.
사실, 이 시리즈는 공포 영화만큼이나 취향을 타기로 유명하다. 거의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만나서, 생각을 공유하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연출이 누군가에게는 거의 ASMR급 잔잔함이 되어 지루함을 줄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리즈 내내 OST가 거의 두어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스크린 속 둘의 대화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나의 인생 영화, 비포 시리즈의 첫 편을 보고 다음 편을 찾게 되는 사람이라면 아마 연례 행사로 비포 시리즈 정주행을 계획하게 될 것이다.
Movie Tip 1. 본문에 말했듯, 이 시리즈는 9년의 시간을 주기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3편의 영화 속에 담고 있다. 이 3편의 영화는 실제로 9년의 주기로 개봉되었고, 이러한 디테일은 비포 시리즈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비포 선라이즈 - 1995년, 비포 선셋 - 2004년, 비포 미드나잇 - 2013년)
Movie Tip2. 극중 제시와 셀린느 역할을 맡았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시나리오 제작 시점에서 직접 참여했고, 이로 인해 좀 더 그들의 언어가 반영된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랑 별개로 시나리오는 시중에 책으로도 출판되어 있는데, 셀린느가 전 남자친구를 살해했다는 등 영화와 설정이 살짝 다르다.(셀린느의 전남친 살인 혐의가 드립인지 고해성사인지는 모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