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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라면순한맛 Oct 16. 2018

펭귄 하이웨이(Penguin Highway, 2018)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사실 그리 지루하지 않다.

[스포 주의]


펭귄 하이웨이 (Penguin Highway, 2018)


 스스로를 아이가 아니라고 여기며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소년의 진지함과 자연적인 우성 선택의 진화 과정으로는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펭귄들의 귀여움. 영화 '펭귄 하이웨이'의 첫인상으로 떠오른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이었다. 분명 이 영화는 펭귄과 바다처럼 수없이 재사용된 순수함의 클리셰를 남발하리라. 그리고 나선 현실을 깨달아 철이 들어버린 주인공이 남겠지? 이미 끝을 본 것만 같은 그 첫인상은 딱 영화 중반까지였다.


 뛰어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며 연신 어른 흉내를 내는 소년 아오야마의 세상은 사실, 그의 호기심을 한 몸에 받는 치과 누나의 모든 기호가 관여되는 곳이다. 영화 속 조용한 마을의 기묘한 사건들은 알고 보면 모두 소년이 궁금해하던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소년은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펭귄과 따뜻한 볕, 청량한 탄산을 좋아하고 흐리고 깜깜한 밤, 박쥐와 누군가 그려놓은 기괴한 괴물 그림을 싫어한다는 것을 말이다. 소년의 세상 속에서는 그 한가운데 단단히 버티고 있던 치과 누나의 모든 것이 소년이 떠올릴 때마다 툭툭 튀어나왔으라.


펭귄 하이웨이 (Penguin Highway, 2018)


 그렇게 영화의 서사는 실재가 아닌 소년의 상상의 나래가 타래가 되는 과정인 줄 알았다. 딱 그 정도여도 분명 이 영화는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의 첫인상은 점점 옅어지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고, 그 시점은 ‘바다’로 인해 마을 전체가 재해 지역이 돼버렸을 때 즈음으로 기억한다. 사실 나는 아이들의 시선이 순수하고, 귀엽고,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절대로 현실적일 수 없을 거라고 여기던 아오야마의 세계는 실재하며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고, 이는 감독이 단순히 동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일깨워줬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는다.' 흔히 오래된 연인들에게 자주 통용되는 잠언 같은 문장이다. 하지만, 사실 이 문장이 이 세계의 진리에 예상치 못한 만큼이나 가까이 있다는 것을 감독과 작가는 이야기하려 한다. 얼마나 똑똑하게 크게 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소년의 첫 내레이션이 얼마나 진지한 출사표였는지는 단지 그것이 익숙한 표현으로만 들리는 우리의 귀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펭귄 하이웨이 (Penguin Highway, 2018)


 아이들의 시선 속에는 익숙함이란 없다. 매일이 새로운 그들은 매번 걷는 등하굣길에서 늘 새로운 모험을 찾아낸다. 상식의 상, 하한선이 없는 그 시선을 통한다면, 학교에서 배운 연역적인 실험관찰의 방법으로 강낭콩의 성장과 개구리 해부에 적용되는 똑같은 크기만큼 펭귄이 되는 콜라캔과 공중 부양한 대왕 물방울을 살피는데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꽤나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맨 처음 들려온 아오야마의 내레이션, 자신이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 얼마나 대단할지 도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는 그의 멋진 포부를 우리가 단지 귀엽게만 받아들였던 이유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소년이 가늠이 안될 정도로 훌륭하게 자라기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평범해진다는 것이 익숙하다. 우리는 이 세계의 익숙한 서사에 침식되어버린 것이다.


펭귄 하이웨이 (Penguin Highway, 2018)


 사실은 깡통을 던져 펭귄이 튀어나오게 하는 사건과 양자 영역 속에서 국소성의 모순을 극복하고 입자의 얽힘 현상으로 인해 수십 년 전 실종된 누군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설정은 엇비슷한 크기로 비현실적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 좀 더 우리에게 신뢰를 주는 친숙한 방법으로 설명이 됐을 뿐. 단지 그뿐임에도 전자는 산타가 실재한다는 말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들리지만 후자의 경우 상당히 신빙성 있는 학문적 접근 인양 우리에게 흥미와 신뢰를 소구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보니 아오야마는 전혀 어른스럽지 않은 아이였던 것 같다. 그 소년이 정말로 어른스러웠다면, 어느 날 마을에 펭귄이 출몰했다는 소문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여겼을 테고, 아마존 프로젝트 따위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며, 오랜 관찰 끝에 치과 누나가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지도 못했으리라. 그 소년은 단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 아버지의 조언대로 가설을 세우고 실험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부지런한 초등학생이었다.


펭귄 하이웨이 (Penguin Highway, 2018)



 나에겐 영화 속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이 비단 주인공 소년뿐 아니라 그의 친구들, 이웃들과 타인들에게 똑같이 보고 느낄 수 있게 만들어진 영화의 설정이 이런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익숙지 않은 사건은 실재할 수 있다. 바로 오늘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시간여행이나 외계인과의 조우가 내일 당장 실현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배우며 늙다 보면 어느새 익숙지 않은 것은 틀리고 불가능하다 생각하기 마련이고,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는 우리 어른들의 모습을 펭귄 하이웨이를 찾고 있는 어느 소년의 독백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향해 초반에 뿌려놓은 떡밥을 회수하지 못한 책임감 없는 작품이라고 조롱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오히려 그러한 의문이 크게 들수록 스스로 익숙한 방법에 침식된 정도가 크진 않을지 반문해보는 게 어떨까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렇지 지루하고 당연하지 않다. 사실 어딘가에서 깡통을 던져 펭귄을 만드는 누군가가 우리를 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펭귄 하이웨이 (Penguin Highwa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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