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man is an island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슬프고 고독하다. 모두 각자의 삶을 외롭고 무겁게 버텨내고 있다. 한 명 한 명이 마치 섬과 같이 고립되어 조난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난당한 그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보인다. 하루하루 그들의 버팀은 단단해져만 가는 것 같다. “징글징글한 삼 형제.”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매일 징글징글하게 만나 함께 버틴다. 매번 징글징글하게 함께하는 그들을 목격하며 드라마의 메시지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크고 작은 상처, 상식적인 상처와 말도 안 되는 상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상처가 있으며 그것의 크기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리고 각자의 상처는 오로지 당사자 스스로만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왼쪽 팔이 잘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남아있는 오른쪽 팔로 사는 법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이는 누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지 않는가. 그렇게 버티며 살다 보면 누군가가 나의 고됨을 그저 조금 알아주더라도 충분히 고맙고 힘이 되겠지. 다만, 타인의 역할은 그뿐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 공감의 한 마디가 고파 고립된 나의 섬에서 젖은 풀을 태우며 누군가 지나가고 있지 않나 항상 살피고 있는 내 모습이 익숙했다.
그런 나에게 드라마는 심심한 위로를 건네었다. 극 중 유라(나라 역)의 눈에 비친 것처럼, 누가 봐도 텁텁한 인생들을 살고 있는 후계역 주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버티는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위로가 되고, 고맙고, 부러워서 그곳의 구성원이 되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후계역 주민들의 관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사이가 극 중 지안(이지은 역)과 동훈(선균 역)의 관계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심하다가 껄끄럽다가 이내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실과 관계들은 하나같이 적대적이지만, 조금씩 서로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되면서 어느새 서로가 무슨 짓을 하게 되든 상관없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것의 시초는 서로를 향한 연민이고, 이는 이 둘이 가장 경계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동훈은 자신의 고통을 나누지 않고 삼킬 줄만 아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해주던 별 거 아니라는 그 말을 더 이상 해줄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별거 아니란 말을 곱씹으며 힘든 상황을 버텨낸다. 그런 그를 극 안에서 바라보는 인물들이나 극 밖에서 바라보는 시청자들은 점점 마음이 쓰인다.
동훈에게 마음이 쓰이는 이유는 힘들어하는 동훈의 모습에서 같으면서 다른 우리 스스로가 보이기 때문이다. 수만 가지 이유로 버티기 힘든 우리와 같으면서 다르게, 혼자 온 힘을 다해 버텨내려는 그를 보면서 우리는 묵직한 감동과 먹먹함에 젖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후계역 커뮤니티가 나에게는 없는지 주변을 곱씹어보게 된다.
누구나 그렇듯 상처 받은 나는 동훈과 지안, 후계역 주민들이 눈부시다. 극에서 그들은 지긋지긋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내가, 나의 지금이 괜찮다고,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위로를 건넨다. 그들의 위로에는 가식이 없다. 오직 공감과 응원이 가득할 뿐이다.
그 어떤 옛날, 영국의 한 시인이 왕에게 바친 글귀처럼 그 누구도 섬이 아니었고, 휴머니티라는 대륙에 모두가 연결되어 있었다.(No man in an island, entire of itself ;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a part of the main. - John Donne) 한 명 한 명이 버티는 그들의 삶은 고독하지만, 매일 밤 그들은 같은 술집에서 눈을 마주 보고 서로가 얼마나 힘든지 이해한다. 그러다가 각자의 집으로 귀가한 후 다시 내일을 살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