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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ca Aug 27. 2016

합법적인 재난


성북동에 한 카페가 있었다. 좋아하던 뮤지션이 전시도 하고 공연도 한다고 하니 어렵게 찾아갔다. 특이한 공간이었다. 커피를 파는 갤러리인지 전시를 하는 카페인지 그 정체성이 모호한 곳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인테리어 소품인지 예술가의 작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이 썩 재미있게 다가왔다.


그랬다. 말 그대로 재미있는 곳이었다. 나에겐 고심 끝에 태어난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혜안이 없었다. 그저 재미있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 재미있는 곳에서 전무했던 나의 문화적 소양을 쌓기로 마음먹었다. 퇴근길에 들러 전시를 보며 커피를 마셨고, 주말에 책과 음반을 챙겨가 반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직원들은 항상 친절했다. 내가 듣고 있는 음악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돌이켜 생각해보면 2009년에 CDP를 카페까지 가져와 음악을 듣는 사람이 얼마나 신기해 보였을까..) 가져온 책의 표지를 보더니 갑자기 이 작가를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당황스러웠다. 딱히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나라의 부름에 다녀오는 동안 카페가 문을 닫았다. 괜히 섭섭했다. 대신 한남동에 이어 경리단길 부근에도 새롭게 문을 열었단다. 영화에도 나와 유명세도 타고 장사도 잘 된다고 하니 개인적인 섭섭함은 접어두기로 했다. 유일하게 쓰던 카페 멤버십 카드는 그렇게 지갑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지나갈 때마다 가끔씩 들러 그 공간을 예전처럼 어설프게 향유하곤 했다. 달라진 방식이라면 CDP 대신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게 됐고, 둔탁한 카메라 대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게 됐고, 책 읽기 좋은 자리 대신 콘센트와 가까운 자리를 찾게 되었다는 것.


해마다 두어 번 정도는 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았다. 전시는 예전보다 더 역동적이었다. 하지만 그 역동성이 무엇에서 기인하였는지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1년 동안 외국에 나가 살게 되었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전기나 물의 공급도 안정적이지 못했던 곳이었다. 나라의 부름과 마찬가지로 내 몸 건강히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곳이었다. 자연스레 한국의 소식을 접하는 일이 뜸해졌다. 그 사이 카페는 영화 출연이 아닌 다른 이유로 유명해져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 접한 소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카페는 한남동의 건물에서 쫓겨날 위기에 있었다. 그 건물의 주인은 유튜브 최고 조회수 기록을 가진 연예인이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인과성도 없이 여기저기 잘려나간 채로 돌아다녔다. 사실과 루머가 뒤섞여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건물주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퇴거를 요구했다. 세입자는 그 절차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 현장은 너무나 적법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곳엔 분명히 법적으로 문제없는 폭력이 있었다.


카페는 법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보호받을 수 없었다. 그 프레임 안에서 카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몫 챙기려는 악성 세입자였다. 그리고 그 프레임을 벗어나 한남동이라는 핫플레이스에서 장사하는 부자 세입자가 되었다. 나아가 상대가 연예인이라는 점을 악용해 감성팔이밖에 할 줄 모르는 수준 이하의 세입자가 되었다.





사람마다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에 이견은 없다. 나에게는 특별한 공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공간이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것을 숫자로만 표현할 수도 없는 일이다. 건물의 시세나 임대료처럼 숫자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던 과거의 잘못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많은 전례가 있다. 무형의 가치를 금전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법치주의에 관해 논하자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텍스트만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이 감정은 상기한 프레임 안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개인과 장소의 관계, 나아가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는 법적인 사실관계라는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무의미하다.





상실감은 무엇인가를 소유했음을 전제로 한다. 나는 그 공간을 소유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온다. 다른 누군가와, 다른 무언가와 함께 공유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감정에 법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니 이것은 개인적인 바람이다. 나에겐 아직도 그 모든 가치를 가늠할 혜안이 없기 때문에 이를 '사회적 문제'라 단정 지을 깜냥도 못된다. 그러니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다. 이 합법적인 재난이 멈추기를.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은 난민이 되었다. 설 자리를 잃은 공간은 무너지고 이내 사라졌다. 곧 새로운 공간이 들어선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상당히 익숙한 모양새를 한 공간이 들어선다. 질리도록 반복하지만 이 모든 절차는 합법적이었다. 이내 염증이 난다.


카페는 다음 주에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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