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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Mar 18. 2024

혼란의 논문 제출

초보 연구생의 파닥거리는 흑역사

#의식의 흐름 주의

논문에서 그나마! 흥미로워 보이는 그림


이곳, 대학원으로 돌아온 지도 반년이 흘렀다. 징하게 더운 여름이라 생각하며 시작했고, 물이 얼지 않는 겨울이라도 오자 살 만하다 생각했던 게 불과 몇 달 전. 이제는 그 겨울이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보는 중이다. 아 물론 겨울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사실 한국에서의 봄~초여름에 해당하는 온화한 날씨다. 여긴 사막이니까.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다. 기껏해야 초고 제출(initial submission)인지라 이제야 진정한 시작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왜인지 여기까지 오는데 맘고생이 꽤 있었고, 자연스레 지금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게 됐다. 고생해서 대단한 것이라도 얻어낸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제 출발선에 선 것이라 생각하면 앞으로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배울 점들이 참 많았고, 그리고 많이 배웠던 것이라 생각해 보는 중이다.


이곳에 오기 전, 석사과정 중에, 그리고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논문과 컨퍼런스 페이퍼를 몇 편 제출한 적이 있었다. 스토리 라인을 만들고 생각을 쌓아가는 과정이 뿌듯했고 퍽 재밌었다. 주제를 잡는 것에서부터 논문 작성, 제출 그리고 리뷰어와의 토론(반박? 해명? - Rebuttal의 적당한 표현이 뭘까?) 과정을 몇 번 돌아보니 박사과정을 가서도 무난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역시나 내 오만과 편견과 착각이었다. (주륵)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내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는 '언어'에서 비롯된다. 물론 영어 실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 역시 매우 큰 원인이지만, 동시에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정연하게 전달하는 훈련 역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는 중이다. 이 포스트에서 다룰 이곳에서의 첫 연구 경험은 작년 10월부터 올해 3월 초까지의 이야기다. 솔직히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댕청한 흑역사 정도라 해두자.


23.10 - 23.11 / 연구 시작 - 문제 정의

작년 10월 초, 연구를 해 볼 만한 주제를 제안받았고 연구실에서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석사 때도 게임이론을 해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게임이론 안에서 처음 접해보는 개념을 실제 문제에 적용해 보기로 개괄을 잡았다. 하지만 직접 '연구'를 진행하기에 앞서 문제 정의(Problem formulation)를 하는 데만 1개월 반가량이 소요됐다. 즉 연구에 필요한 코드를 짜는 건 11월 말이나 되어서야 가능했던 것인데, 그전까지는 교수님 두 분과 멘토(포닥)한테 신랄하게 피드백을 받아 가며 문제 정의 문서만 주구장창 작성했다 지웠다만 반복했다. 처음 제안받은 개념이 머리에 자리는 잡히지 않고, 그러다 보니 이 새로운 개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늘 의문을 품은 상태로 연구가 진행됐다. 와중에 문제 정의는 해야겠고, 아니 그 이전에 '문제 정의'에서 '문제(problem)'의 정의가 무엇인지부터가 감이 안 잡히니 결과물은 엉망이었다. 초반에는 교수님의 피드백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자리를 잡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결국 나는 포닥과정에 있는 내 멘토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고, 멘토는 나에게 미끼를 던지듯 힌트를 주며 조금씩 조금씩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줬다.


참고로 여기서 problem은.... "문제가 있다"의 문제가 아니라 "수학적 문제"의 문제를 의미한다. 전자가 "고민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논쟁, 논의의 대상"이다. 즉, 문제 정의란 "이러이러한 어려움이 있으니 이걸 해결하겠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제가 풀려는 논의의 대상은 이렇게 생겼어요!"에 해당한다. 이 사실을 모르고 계속 덤볐으니 교수님은 교수님대로 "네가 쓴 거엔 문제(problem)가 전혀 없잖아 (네가 뭘 하려는 건지가 전혀 안 나타났잖아)?"라고 말하고 나는 나대로 "첫 문장부터 현 상황의 어려움(problem)을 말하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가 무한 반복된 것이다. 후일 이 사태를 파악한 멘토는 외국인 학생들한테 흔히 발생하는 일이라며, 네가 익히 알던 단어의 의미가 실제로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며 웃어줬다. 생각과는 다른 곳에 문제가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엔 문제(맘고생을 유발하는 것)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 후련했던 기억뿐이다.


23.11 - 24.01 / 연구 진행


11월부터 12월을 지나 새해가 밝았다. 약 2달간의 기간 동안 코드를 짜고, 프로그램 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연구 결과를 다듬어갔다. 전 연구 과정 중 가장 순탄하고 할 만한 일이었다. 문제정의 과정이 끝난 뒤 코딩부터 결과 도출까지 큰 이변 없이 진행되면서 자신감이 차올랐던 때이기도 하다. 마음 한편에는 '논문 작성 단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이었다.



새로이 접했던 상관균형(Correlated equilibrium)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혔고, 직접 코딩을 해보면서 수식으로 작성했던 식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인지 다가왔다. 상당히 이론적인 논문이 될 가능성이 컸고, 실제로도 내가 해왔던 연구들 중 가장 수식이 많고 이론적이었다. 이론과 수학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내 연구가 좀 더 엄밀해지고 이론적인 것들을 좀 더 잘 다뤄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에, 공부하면서도 꽤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교수님들과 멘토와 상의하자 이제 어떤 컨퍼런스/저널에 이 연구결과를 제출해 볼지 생각해 봐도 좋겠다는 답변을 얻었다.


폭풍전야였다. 그땐 몰랐지만.


24.01 - 24.03 / 논문 작성 및 제출


1월 중순쯤,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를 추가로 더 확장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오갔다. 분명 지금 결과도 한 편의 이야기로 정리될 수 있을 만큼이긴 했지만, 저널에 실릴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했다. 나는 논문 제출 기한까지 2달이 채 안 남았다는 점 (3월 1일 due), 그리고 내가 논문 작성에 시간이 꽤 걸릴 수 있다는 점을 들어 한 번 wrap-up 하고 나아가면 좋겠다 이야기했다. 바로 논문 작성 단계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으로 manuscript를 작성하기 전에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연구실에는 pre-writing form이라는 스토리라인 정리 포맷이 있었고 내 나름대로 이 문서를 채워가 보며 논문을 구상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제야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코딩이 진행되고 결과 그래프가 나오는 기분에 취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마음 한편을 누르고 있던 문제.. 이 연구 왜 해야하는거지..?


기초적이지만, 내가 간과해 왔던 부분이었다. 기술적인 기여점은 확실했고, 수학적인 증거도 뚜렷했지만,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여점이라면 사실 독자를 설득하기는 어렵다. 기술적 기여점과 연결될 수 있는 추상적 기여점이 식별돼야 했다. 물론 멘토는 이 기여점을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당장 성급히 쫓아가는 데 급급해 중요한 걸 간과했던 것이다.


결국... 다시 23년 11월부터 있었던 '문제 정의'의 논의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내가 풀고자 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앞서 수학적 Problem을 정의했다면 이젠 어떤 추상적 Problem을 풀겠다는 것인가? 에 답할 수 있어야 했다. 데자뷰 같은 느낌은 틀리지 않았고, 제출기한 1달 반을 남기고 무슨 문제를 푸는지조차 모르는 댕청이가 된 채 약 3주의 시간을 보냈다. Problem이라는 단어에 트라우마가 슬슬 생기며 날씨는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2월 말이 됐다.


지금 글로는 '추상적 기여점'이니 '기술적 기여점'이니 써놨지만, 사실 이 느낌적인 느낌을 제대로 영어로 표현하지 못했다. 미팅을 하고 멘토를 만나면서도 "이 느낌...! 에 문제가 있다!"라는 이상한 궤변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막막했다. 하지만 고수들은 파닥거리는 초보 연구생을 보며 무엇에 답답함을 느끼는 것인지 금세 이해했고, 힌트가 될 만한 단어들을 나에게 조금씩 내어줬다. 그중에는 내가 궁금해하던 '추상적 기여'를 상징할 만한 단어가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해 문제를 정의"할 수 있었다. :) 내가 쓰면서도 뭔 말인지 모르겠네 미래의 나는 이 글을 읽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것이다.


이렇게 연구의 이유가 제출 마감 3주 전에 확정되었고 (이게 무슨 일이람)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정말.... 내 영어 글쓰기는 개판이었다. 논문에는 we, our와 같은 1인칭 대명사를 쓸 수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마음껏 써도 되는 표현이었고 (our research는 지양), 수동태는 아예 쓸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것 등 전혀 몰랐던 사실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수동태를 썼다간 모두 한결같이 분노했다. 하지만 논문 제출 직전까지 수동태가 계속 발견되어 꾸준히 한소리 들었다는 후문.) a the 제대로 안 쓰는 건 기본이었고... 그래머리랑 퀼봇을 다 써가며 오류를 잡아가고자 노력했지만.. 그래머리 같은 프로그램으로 제발 문법 오류 좀 잡으라는 피드백을 받았을 정도로 오류가 산더미였다. 프로그램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문장이 있었던 게다.


교수님들과 멘토에게 원고를 송부하고 솔직하고 맵게 날아오는 리뷰와 다가오는 마감 기한을 보며 긴장과 부담이 마구 늘어만 갔다. 명치 조금 아래가 어느 날부터 슬슬 아픈 것이 위염이 도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별 수 있나, 3월만 버텨보자 하고 지냈다. 고맙게도 함께 있는 연구실 동료들이 제산제를 주었고, 나에게 응원의 말을 건넸다. "Sustain. Just sustain!" (버텨 ㅋ). 정말이지, 함께 있는 연구실 동료들이 너무 좋다. 내가 다음에 갈비 구워줄게.


마지막 2주는 그저 논문 제출만을 바라보며 밀어붙였다. 교수님 한 분은 "왜 이번에 제출하려 하냐, 부족한 상태로 별로인 논문을 낼 바엔 제대로 된 걸 작성해 보는 게 네 훈련에 도움이 된다."라며 제출 보류를 권유했다. 실제로 마감기한인 3월 1일까지 적정 수준의 원고가 준비되지 못했고, 컨퍼런스는 포기, 제출기한이 없는 논문 작성 쪽으로 방향이 변경됐다. 하지만 웬걸, 결정이 내려진 바로 다음날 마감 기한이 1주 미뤄졌다는 소식이 공지된 것이 아닌가? 마지막 1주일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번 더 다음 버전의 원고를 작성해 교수님들께 제출 준비를 해보겠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마지막 1주일은 정말 피곤한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론 기분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밀어붙여보고 싶다 의견을 전달했을 때, 멘토는 제출 전까지 매일 미팅을 잡아 나를 도와주었고, 교수님 중 한 분은 "원고를 보내주면 12시간 이내로 피드백을 주겠다. 어떻게든 제출하도록 도와주겠다."라고 회신했다. 처음으로 함께 글을 써보는 것인 만큼 많이 도와줄 테니 한 번 끝까지 해보라는 것이었다. 민망스러우면서도 '민망'을 영어로 몰라 땡큐라고만 답장을 썼다. 또 다른 1주일이 흘렀고, 제출 당일까지 민망하리만큼 감사한 도움과 민망하리만큼 초보적인 실수를 수정하며 결국 기한 3시간 전 제출을 했더란다.

Hㅏ

23.03 / 일어나 이제 다음 거 해야지.

공교롭게도 제출 기한 다음 주, 그러니까 글을 쓰는 지금은 1주일 간의 봄방학이다. 늘어지게 쉬며 오랜만에 장도 보고 음식도 하면서 평화를 되찾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짧은 방학이지만 교수님은 학교에 있었고, 마침 원래 미팅을 하는 날이었기에 사무실을 찾아갔다. 내가 헬로 하와유를 하고 자리에 앉자 교수님은 "I think you must be relieved now."라며 살 만하냐 물었다. 네 살 만하죠. 스벅 가서 커피도 마시고 삼겹살도 구워 먹었다 자랑했다. 삼겹살 어떻게 먹냐 물어봤을 때 그냥 구워 먹었다 이야기했다. 김삼이었는데 김치까지 말하면 괜히 길어질 것 같아 생략. 원고 작성 과정이 엉망이었는데 인내를 가지고 지켜봐 주어 감사하다 전했다. 담백하게 my pleasure가 돌아왔다. 


앞으로 열심히 훈련해서 좋은 writer가 되어보라신다. 교수님은 쉬는 동안 Jane Austen의 책을 읽어보라 권했다. 영어로 읽을 땐 누군가 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이다. 오만과 편견 원제목이 뭔지 찾아보고는 아마존에 Pride and Prejudice를 검색해 구매했다. 곧 올 것이다. 


늘 주변에 좋은 분들이 있어 지긋한 따뜻함을 느낄 때가 있다. 남은 박사과정도 노력과 버팀, 그리고 좋은 사람들로 채워져 나갈 수만 있다면 준수하게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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