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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Feb 24. 2017

바람맞은 이야기

laminar flow

Laminar Flow

바람맞은 이야기


  사실 laminar flow라는 단어는 전공책에서 보던 단어다. 한국말로는 '층류'라고 부른다는데, '깔끔한 흐름'이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 "그럼 '더러운 흐름'도 있나?"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깔끔한 흐름의 반대는 더럽다기보다는 '난잡한 흐름'이라는 뜻의 '난류' 혹은 'turbulent flow'라고 불린다. 하긴 생각해보니 깔끔함의 반대는 더러움이라기 보단 '어지러운', '복잡한'이 맞겠다. 더러움의 반대는 깨끗함이고. 내 방 보고 더럽다고 하는 어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깨끗함의 반대였다니. 서럽군.


  난류하면 난기류가 떠오르고, turbulent하면 turbulence(결국 난기류)가 떠오른다. 이 둘의 이미지는 좀 불안한 편에 속한다. 난기류가 심하다는 안내 방송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드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는 깔끔한 층류보다는 난류를 더 자주 만난다. 바람이라는 것이 워낙 예민한 것인지라, 조금이라도 방해를 받으면 한 곳으로 질서정연하게 흐르던 체계가 꼬이고, 휘감기고, 에측 불가능하게 부르르 떨며 혼돈의 카오스로 빠진다. 심지어 바람 자기네들끼리 부딪혀서 난류가 되기도 한다. 성질 급한 새우같은 것들.


  땅에 붙어 사는 인간 주변엔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산도 있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딱히 정확한 높이를 알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건물도 많으니, 그 사이를 흐르는 바람들은 깔끔할래야 깔끔할 수가 없다. 도심 돌풍이라는 말이 있다던데, 실제로 쓰는이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바람이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어느 정도 고개는 끄덕여진다. 건물 안에서도 마찬가지. 에어컨,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은 프로펠러 깃으로 공기를 쳐내서 만들어졌으니 태생부터 말 다했다.


물도 예외는 아님 _ 갑천 징검다리


깔끔한 바닷 바람

헤이그 scheveningen에서


  교환 학생 초반, 살던 곳에서 1시간 정도 트램을 타면 이를 수 있던 바닷가에 가 보았다. 서쪽으로 넓은 대서양이 펼쳐진 곳이었고, 저녁 시간 해가 넘어갈 때쯤의 석양이 절경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약간의 정신승리만 더해, 일몰이나 일출이나 그게 그거지라는 생각까지 하면, 탁 트인 곳에서 조용하게 일출을 감상하는 듯한 기분도 만끽할 수 있다.

  

보정이 아니다. 리얼이다. _ 헤이그 scheveningen 해변


  비교적 곧게 쭉 뻗은 해변가 중간 어딘가에,  툭 튀어나온 잔교같은 곳이 있었다. 생긴 건 잔교였지만 사실 상 전망대의 역할을 하는 듯 했는데, 그 곳에 오르자 거침없이 대서양 위를 가로지르던 거센 바닷바람이 몸을 '후려'쳤다. 거센 바람을 맞을 때 나오는 특유의 숨막힘까지 발동하면서 약간 당황하고 있던 차, 몸을 의지하기 위해 옆에 있던 난간에 손을 얹고 몸을 기댔다.


  몸을 기대고 얼굴을 난간 밖으로 내밀 때였다. 귀로 들려오던 '부루브쁩부루루부루부루-'하는 거센 소리가 순간 '쏴-'하는 깔끔한 소리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이리저리 정신 못차리고 날아다니던 머리카락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아마 이마가 까진 상태였을 것 같은데.. 보는 사람은 없었을테니 뭐) 감지할 수 있는 모든 힘이 흔들림 없이 일정해졌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도 자세가 유지될 만큼 매우 강한 바람임에도 숨이 막히지 않았고 가슴 속으로 시원한 바닷바람이 들어찰 뿐이었다. 팔을 벌리면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상쾌했다. 시원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바람의 '깔끔함'이구나. 깨끗함 말고 깔끔함. 바람을 즐길 뿐인데 이토록 새로운 느낌인 걸 보니 살면서 이런 바람을 맞아본 적이 없었던가보다 싶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일상 생활 속에서는 이런 바람을 경험할 수가 없다. 숨막히는 듯한 느낌도 결국 심리적인 방어기제일 뿐이니, 정신 없이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이 불면 뭐라도 날아오지는 않을지, 불안한 마음에 숨부터 막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날 이후 해풍을 기대해볼 수 있는 맑은 날 늦은 오전 즈음이 되면, 바다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바다란 먼 곳의 이야기이니 휴가를 즐길 때나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나에게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바다에서 깔끔한 바람을 맞이해보고싶다는 생각 한 번은 해보겠지. 내가 바닷가에 서 있으면 누군가는 '고상한 척 사색하나보다'할 지도 모를 일이지만 난 단순하게도 그냥 바람맞고 있을 뿐일게다.




다음날

난 감기에 걸렸다.


*감기주의


17.02.24 집.
우체국에서 12시 전까지 온다는 연락에 대기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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