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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Jul 31. 2022

어떤 기억은 우리를 흔든다

영화 <애프터 양>

영화 <애프터 양>은 시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과학 기술이 발달한 미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영화 속 시대는 사회 곳곳에 다양한 종류의 안드로이드가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테크노 사피엔스’라는 인류의 한 종류처럼 칭할 정도로요. ‘양’은 한 가족에게 입양된 안드로이드의 이름입니다. 인간과 구별이 안 될 만큼 사람같은 양은 미국 가정에 입양된 중국인 딸 ‘미카’의 문화적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해주는 ‘컬쳐 테크노’입니다. 하지만 양은 미카에게 중국 문화를 알려주는 것을 넘어 미카를 세심하게 돌봐주는 오빠이기도 합니다. 이들 가족은 마치 4인 가족처럼 살아가죠. 그런데 어느 날, 양이 갑작스럽게 작동을 멈춥니다.


미국 가정에 입양된 중국인 딸 ‘미카’와 그의 오빠와도 같은 컬처 테크노 ‘양’

미카의 아빠 ‘제이크’는 양을 되살리기 위해 여러 수리 센터를 방문합니다. 하지만 양의 중심부에 문제가 생겨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뿐입니다. 그러다 제이크는 양의 메모리를 추출 받아 갖게 됩니다. 양의 메모리에는 과연 어떤 장면이 담겨 있을까요? 제이크는 왜 양의 흔적을 계속 좇게 되는 걸까요?


양은 미카 가족과 함께 하면서 수많은 장면을 메모리에 담았습니다. 찻잎이 물 속에서 조용히 부유하는 순간, 동생 미카가 걸어가는 장면, 장대비가 쏟아지는 풍경 속에 누군가가 우산을 쓰고 계단을 오르는 모습, 싸우고 난 뒤 우울한 공기. 양이 어떤 기준으로 그 순간을 촬영하고 저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장면일테죠.


일과 삶에서 지쳐 있던 제이크에게 이 영상은 단순한 홈 비디오 그 이상입니다. 제이크는 찻잎을 파는 일을 하는데, 그 일에 무척 매료되어 있고 어쩌면 소명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는 시대에서는 찻잎보단 가루를 물에 타 먹는 것이 일반적인가 봅니다. 일생을 바친 일이 옛것으로 치부되는 상황에 제이크는 허망감을 느끼는 듯 보입니다. 아내 ‘키라’와도 항상 다정한 사이는 아닙니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지만, 가족애가 조금씩 닳아가고 보채는 순간이 잦아집니다. 미카는 양의 영상을 통해 그의 삶에서 소중했던 순간들, 이를테면 찻잎을 천천히 우려내며 대화하는 장면, 가족과 함께 웃는 장면을 봅니다. 별다른 사건이 없어도 편안하고 반가운 장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는 그런 장면이요. 제이크는 깊은 마음의 수렁에서 점점 빠져나오는 듯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오 년, 십 년이 지나도 저에게 각인된 것은 대단한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별거 아니지만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햇살을 받으며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아침, 초록빛이 번지는 공원에서 누워 있던 오후,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달렸던 드라이브, 알딸딸하게 취해 걸었던 겨울밤의 거리. 그 중 어떤 기억은 진동을 만듭니다. 어릴 때 다녀왔던 여행의 기억은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이겨낼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하고, 친구나 애인과 함께 했던 추억은 그가 미워도 용서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양의 메모리 속 몇몇 장면에서는 같은 장면인데도 조금씩 다른 템포로 대사가 중첩되어 들립니다. 기억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제이크나 키라가 같은 장면을 실제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것일 테죠. 그리고 아마 이 장면이 그 둘의 기억 저편 어딘가에 있었을 겁니다. 단지 최근의 사건에 밀려나 잊혀져 있었을 뿐. 저와 함께했던 사람들도 그 순간을 저와 다르게 기억하겠죠.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양이 미카 가족의 소중한 시간을 메모리에 담았던 것처럼, 제가 기억하고 있으면 되니까요.


코고나다 감독의 씨네21 인터뷰 읽어 보기

왓챠에서 <애프터양>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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