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느끼고 싶지 않았던 외로움
<12>
벤쿠버에 도착한 첫날은 1주일간의 나의 벤쿠버 여행 기간 동안 유일하게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었다. 맑고 청량한 파란 하늘, 깨끗하고 깊은 속까지 시원해지는 맑은 공기, 과연 듣던 대로 광활한 자연과 맑은 공기를 가진 도시였다. 벤쿠버는 생각보다 첨단화된 곳은 아니었다.
여전히 번호 키가 아닌, 들고 다니는 열쇠를 사용하는 곳이 훨씬 많았고, 영화관도 미리 좌석을 지정할 수 없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낙후되어 변화가 어렵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굳이 그 변화를 원치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지금 이대로도 행복하고 충분히 살기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들의 가치관이 부러웠다. 그래서인지 많은 것에 관대했다. 길거리에서 클랙슨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고, 골목길에서도 차들은 사람들이 건널목을 다 건널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려주곤 했다.
그들의 그런 여유로움은 서울과는 많이 달랐다. 뭐든지 빨리빨리 돌아가고, 화와 급함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끔 서울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곤 했다. 싸움을 걸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누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잘못하기만 해봐라 라며 눈을 흘기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 나 또한 그랬다. 작은 것에도 쉬이 짜증이 났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자위했지만, 자기 합리화일 뿐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벤쿠버가 좋았다. 처음 스카이 트레인을 내렸을 때 만난 할머니는 내 숙소까지 직접 나를 데려다주셨다. 시장을 보고 오는 길이라던 할머니는, 내가 들고 있는 주소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십 분쯤 나와 함께 내 숙소를 찾기 위해 걸어 주었다.
나라면 그렇게 해 줬을까. 타이페이 사람들의 친절함이 순수하고 순박한 호의였다면, 벤쿠버 사람들의 그것은 사랑스럽고 따뜻한 호의였다. 폴의 스윗함은 아마 그가 자라 온 이 곳의 문화 때문이었겠다 싶었다. 그가 신나는 노래와 파티, 클럽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은 이토록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자라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벤쿠버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폴에게 보내고, 그 날 저녁 그는 내 숙소로 픽업을 오겠다고 했다. 10그램의 떨림과, 30그램의 설렘과, 40그램의 행복감, 그리고 20그램의 초조함을 느꼈고, 급 피로감과 함께 나는 약속 시간까지 단잠에 빠졌다. 어떤 꿈도 꾸지 않은 채로 나는 그렇게 몇 시간의 낮잠을 청했다.
저녁 6시 반. 잠들기 전 미리 맞춰 놓은 알람이 울렸다. 그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7시 반까지 부지런히 준
비해야 했다. 원피스는 너무 차려입은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편한 옷은 싫었다. 한국에서부터 미리 골라 온 나름의 옷들 중 가장 깔끔하게, 그러나 너무 과하지는 않게 입고 공들여 화장을 했다. 마치 떠나간 옛 남자 친구에게 '나 이렇게 예뻐졌는데도 다시 안 돌아오고 배길 수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그를 다시 만나러 가는 칼 간 전 여자 친구처럼 열심히 화장을 했다. 결과적으로 많이 달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모든 여자의 마음 이리라. 그렇게 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고, 그가 오기 10분 전쯤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 몰랐다. 여러 번 고민해보고,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생각해보고, 어떤 시작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백 프로 만족할 만한 대사 따위는 찾아내지 못한 채로 숙소를 나섰다. 그가 도착하기 5분 전.
주택가에 있었던 숙소 근처에는 많은 차가 돌아다니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숙소 앞에 차를 세울 때 바로 그임을 알 수 있었다. 차를 세우고 내려 걸어오는 그는 퇴근 후 바로 오는 길이었기에 수트를 입고 있었고, 나에게 그런 그의 모습은 조금은 생소했다. 대만에서의 우리는 항상 편안한 옷차림에 뚜벅이였는데, 아우디에서 내리는 수트 입은 그는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조금 나이가 든 모습이었지만, 아마도 수트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어색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It's really strange.. Meet you up in Vancouver?"
되게 이상하다.. 너를 벤쿠버에서 만나다니..
"Right?"
그치..?
"How have you been?"
어떻게 지냈어?
"I've been good. And I don't want you to make you feel any pressure about my visiting.."
잘 지냈어. 그리고, 내가 여기 온 게 너한테 부담이 안 됐으면 좋겠는데..
"It's just like.. not that much related to you.. and I just wanted to visit Vancouver because there was a bargain flight ticket to here.."
이건 그냥.. 너랑 그렇게 많이 연관된 건 아니야.. 벤쿠버행 비행기 티켓이 진짜 싸게 올라오기도 했고..
"Hey, come on.. It doesn't make sense.."
야.. 솔직히.. 말 안 되잖아..
그렇다. 말이 되지 않았다. 정말 이건 웃기고 미친 짓이었다. 그는 내가 벤쿠버로 온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Very stressful"했다고 했다. 친구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한 모양이었고, 그들의 반응은 그와 똑같았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That's crazy"라는 반응이었다고. 역시 내 친구들과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미친 듯이 뛸 줄 알았던 내 심장은 그렇지 않았고, 너무 좋을 거 같았던 내 마음은 그다지 요동치지 않았다. 복잡해질 거 같던 머리도 나름 괜찮았다. 그가 나를 편안하게 해준 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냥 나의 여행에서 현지에 사는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굳이 그를 찾아 떠난 여행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두세 시간쯤 우리는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새로운 사람을 혹시 만나기는 했는지 등등을 이야기하다 내일 저녁에 또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는 자기가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만나니 오히려 낫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오기 전 몇 주동안 꽤나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었다. 왜지 싶었지만, 워낙 생각이 많고 감정도 겹겹이 복잡한 그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날은 반갑게, 그러나 극적이지는 않게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벤쿠버가 무척 좋았다. 온몸 구석구석이 정화되는 듯한 그 깨끗함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상쾌했다. 그리고 그렇게 유일하게 비가 오지 않았던 벤쿠버에서의 첫 날밤은 지나갔다. 밤 새 빗소리와 함께.
잠을 설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낮에 잠을 꽤 청했기에 시차가 애매하게 바뀐 것인지 새벽 6시부터 눈이 떠졌다. 세계의 건강하고 조용한 도시들을 보통 모두 그렇듯 벤쿠버 또한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 도시였다. 아침 7시부터 문을 여는 카페들이 많았고, 나는 아침 7시도 채 되기 전에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스카이 트레인을 탔다.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과 함께 다운타운으로 가면서 본 사람들을 역시 또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회사 가고, 그들이라고 학교 가는 것을 즐기겠소냐만은, 적어도 너무 가기 싫은 곳을 억지로 가고 있는 듯한 서울 지하철 출근길, 등굣길 사람들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내가 여행자였기에 더더욱 그렇게 관대한 시선으로 그들을 봤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공항에서 사지 못한 심카드를 사기 위해 큰 드러그 스토어에 들렀다. Longdon drug는 시내에서 가장 큰 드러그 스토어 중 하나였다. 아마도 내가 거의 첫 손님이었으리라. 아침 7시 반에 와서 심카드를 사려한다니, 우스웠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상품은 없고 한 달짜리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망설였다. 굳이 그럼 살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나라에서 심카드를 사서 로컬 번호를 갖고 다니는 게 좋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폴과 그렇게 같은 도시에 있음을 느끼고 싶어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로컬 번호를 쓰면서 캐네디언이 된 듯한 느낌으로 그와 연락하고, 시간을 보내는.
한 달짜리 심카드를 무려 50불을 주고 사고서는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갔다. 해야 할 일이 있어 오늘은 하루 종일 카페에 있다가 저녁때 폴을 만날 요량이었다. 나는 그에게 문자를 했다.
"Good morning!"
좋은 아침!
항상 페이스북 메신저로 이야기했을 뿐, 처음으로 그에게 보내보는 '문자'였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Who's this?"
누구세요?
"It's Bo-Eun!"
나 보은이야
"SIM card?"
심카드 샀어?
"Right"
응 맞아
"Wow fast."
오 빠르다
"I woke up at 6:30"
나 6시 반에 일어났어..
"Whoa early"
일찍 일어났네
"Maybe jet lag. Did you sleep well?"
시차 때문인가 봐. 잘 잤어?
"Nope woke up at 3. So I woke up late."
아니.. 3시에 깼어.. 그래서 늦잠 잤어.
그랬다. 이미 오전 9시가 다 됐었고, 그 때야 일어난 모양이었다.
"Oh really? Feel okay now?"
진짜? 지금은 괜찮아?
"Yup, rushing to work"
응. 회사로 튀어가는 중
"Hurry up! See you."
빨리 가! 이따 만나
"Enjoy your day and See you!"
응 오늘 잘 보내고 있어 이따 봐
새벽 3시에 깨서 피곤할 그가 안쓰러웠지만, 이내 잊고, 벤쿠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켜고 있는 내 모습에 내 스스로 만족스러워졌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지만, 나름 낭만적이었고, 수많은 벤쿠버 사람들 안에 섞여 나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특히 아시아인이 많은 이 곳이기에 더욱 그랬다. 놀라우리만큼 흑인을 보기 어려웠고, 혀를 내두를 만큼 아시아인이 많았다. 그래서 미국과 더 다른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보다 편안했고,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그가 살고 있는 도시였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루 종일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고, 나름의 할 일을 마무리해가고 있을 때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일을 끝내고 지금 다운타운으로 오고 있다며 내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쪽으로 오겠다 했다. 마치 우리는 현실 같았다. 그가 예전에 이야기했던 'REAL'이 이게 아닐까 생각했다.
여행지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한창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을 때도 그가 자주 이야기했던 'REAL'. 연애가 이제 단순히 그냥 좋은 감정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고, 그저 보고 싶다 오늘 뭐했냐라는 대화만 해서는 안 된다는. 서로의 삶, 서로의 가치관, 친구, 상사, 회사에서 있었던 일등에 관한 시시콜콜한 '나'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함께 그려나가는 것. 누가 설거지를 하고 누가 쓰레기를 갖다 버릴지 정하는 것, 화상 통화를 몇 시에 하자하고 정하고 그 시간만을 기다리는 롱디가 아니라, 이따 저녁때 영화 보러 갈까? 하고 급 약속을 정할 수 있는, 일 끝나고 데리러 갈게 하고 쉬이 볼 수 있는 현실. 그가 그렇게나 말했던 'REAL'이 바로 이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는 우리가, 연애도 아닌, 우정도 아닌 이 관계가, 이 상황이 묘했다.
"Outside!"
나 왔어 밖이야
그의 문자를 받고 카페를 나서 그의 차에 올라탔다. 둘 다 무척 배가 고팠던 터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직행했고,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Cactus club'이라는 벤쿠버에서 꽤 유명한 음식점이었다.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었지만, 겨울이었기에 사람이 없고 한산한 겨울 바다의 모습이었다. 그는 겨울보다 여름을 좋아했고, 나는 그 반대였다. 그는 아마도 밴쿠버의 여름과 겨울을 알고 있고, 나는 아마도 서울의 여름과 겨울을 나기 때문일 것이다. 벤쿠버의 여름은 서울만큼 덥지 않은 것 같았고, 그곳의 겨울은 지루하리만치 매일 매일 비가 내렸다.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서울의 겨울은 그렇지 않으니 내가 겨울을 더 좋아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가 맛있다는 한 레스토랑을 찾았지만, 예약이 꽉 찬 바람에 우리는 그의 집에 가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마침 그의 공간이 궁금했던 차였다. 다운타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그의 공간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간접 조명이 대부분인 서구의 나라가 그렇듯 그의 집 또한 은은한 조명에 몇 개의 가구가 놓여있었고, 향초를 켜는 그의 행동이 낯설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항상 초를 켜고 지내는 듯 싶었다.
너무 캄캄한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의 공간이니 그가 하는 대로 놔뒀다. 거실에는 여느 집이 그렇듯 작은 소파가 있었는데, 그 소파가 무척 푹신해 우리는 거기 앉아 차를 마시면서 거의 잠들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영화를 보겠냐며 그는 DVD를 켰고, 그 영화를 켜 놓은 채 우리는 또다시 분위기에 취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입을 맞췄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고, 나는
"Is it okay...?"
우리 이래도 돼?
라고, 지우펀에서와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싫었던 것도, 두려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그의 생각이. 그리고 나의 생각이. 처음으로 내가 먼저 진지했던 상황이었다. 이내 우리는 이성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와 그렇게 결론을 내고, 몇 번의 소개팅을 하게 됐다고. 하지만 그게 두 번째 데이트로 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확신하게 된 건 자긴 아직 연애를 시작할 때가 아닌가 보다고. 그리고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일'적인 부분들이 너무 큰 것 같다고.
그제야 나는 그를 좀 더 알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적어도 모니카와 헤어지기 전까지는 나만큼이나 감정적이고, 무모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일에 더욱 몰두해야 함을 느꼈고, 그래서 굉장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면이 커진 것 같았다. 그에 더해 그는 다음 달부터 방영될 티비 쇼 녹화를 이미 마쳐놓기도 했고, 원래 일하던 회사 일과 조금은 다른 분야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하기도 했는데 그 사업 또한 자리를 잡게 하기 위해 더욱 정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와의 이별이 오히려 그를 돌아보게 한 것 같았고, 그 이후로 그는 그 전과는 조금 달라지고 있었기에 그는 누구보다 현실적이지만 누구보다 감정적인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듯 싶었다.
나는 꽤 자주 그가 현실적인 사람인지 아니면 오히려 감정적인 사람인지 헷갈리곤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 역시도 스스로 아직 정의되지 않은 채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고, 아마도 그게 이유인 듯하다는 결론을 나 혼자 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나를 숙소에 데려다주었고,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느끼고 싶지 않았던, 약간 외로운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