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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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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Eun Mar 17. 2016

The Flight_13

<13> 가장 잘 한 일

<13>



"I had no time for lunch.. too busy!"

나 점심도 못 먹었어.. 너무 바빠!


 이 문자를 확인한 것은 점심 시간도 훌쩍 지난 2시쯤이었다. 꿈도 꾸지 않은 채 정신 없이 잤고, 일어나자 폴에게는 너무 바빠 점심도 걸렀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밖은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고, 어제의 우울감과 외로움은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오늘은 발레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미리부터 알아 본 발레 스쿨에 저녁 수업을 갈 요량이었고, 그 전에 벤쿠버에 함께 온 동생을 만날 참이었다. 사실 나는 벤쿠버에 혼자 온 게 아니었다. 함께 동행한 친구가 있었고, 친하다면 친한 멀다면 먼 남자 동생이었다. 벤쿠버 비행기를 예매하고 나서 몇일 후 신년회 겸 친구들을 만난 자리가 있었다. 그 때 그 모임에서 나는 벤쿠버에 가려고 한다고, 비행기표가 싸게 나왔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 중 한 친구가 자기도 벤쿠버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모든 여정을 같이 할 것도 아니었고, 숙소도 다른 곳으로 할 참이었기에 우리는 그렇게 비행기 메이트가 되었다.


 그는 나보다 6살쯤 어린 영균이라는 동생이었다. 키가 크고, 하지만 여자의 심리는 잘 모르는, 전형적인 공대남이지만 수다스러운 특이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벤쿠버에 와서 영균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카톡으로만 근황을 물었기에 발레 수업에 가기 전에 잠시 보기로 했다. 그는 다운타운 내에 있는 한 유스호스텔에 묵고 있었는데, 만나자마자 수다스러운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스텔에서 마음에 드는 한국 여자를 만났다는 것. 그리고 그녀와 많은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 공교롭게도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벤쿠버에 왔고, 돌아가는 비행기도 같다는 것.


 그는 아무래도 운명같다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그럴 터였다. 나도 폴이 비행기를 놓쳤을 때 우리는 아무래도 인연인 거 같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했으니.


 나와 폴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그였기에, 비록 몇일 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이 조금씩 생길 때마다 폴이 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했다. 이 감정이 여행지가 주는 환상에서 오는 감정일 수도 있다는 것. 그 특별한 분위기에서 오는 순간적인 감정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고민중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털어놓았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했다. 내 일을 볼 때는 그렇게 객관적인 시선을 갖지 못하면서, 남의 일이 되고 나니 어쩜 그렇게 모든 것이 잘 보이는지 말이다. 그의 감정이나 또 이야기로 들은 행동에 비춘 그녀의 감정은 여행지가 주는 그 특별함에서 오는 순간적인 감정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꼭 신중해지라는 말도 했다. 내가 이런 조언을 해 주는 게 우스운 거라는 걸 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렇게 그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나는 발레 수업 가기 위해 일어났다. 그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아니 하다못해 나는 사랑이었을까. 그리고 영균이의 그 감정은 우리의 그것과 비슷한 걸까 다른 걸까. 우리 모두 여행지에서의 설렘 때문에 눈이 멀어 그 허공에서 감정 위에 표류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영균이의 그녀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그 때의 나처럼 설렐까. 아님 지금의 나처럼 두려울까. 무엇이 두려운 지도 모른채 그냥 외로울까. 그들은 우리 같은 결말을 갖게 될까. 아니, 우리의 결말은 뭘까.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져 난 결국 그 빗 속에서 정류장을 하나 지나쳤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수업 시작을 5분 남기고 겨우 찾아 간 그 곳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한 발레 학교 였다.

'Goh ballet academy'. 고딕 스타일의 건물이었고, 클래식한 분위기의 내부였다. 얼른 발레 레오타드로 갈아입고 스트레칭을 시작하자 복잡하던 머릿 속은 이내 조금 잠잠해졌다. 역시 발레가 주는 매력이었다. 대학 시절 발레는 나에게 큰 의미였다. 힘든 일들을 잊게 해주는 시간이었으며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취미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나에게 발레는. 가끔은 발레가 취미라는 것에 으쓱할 때도 있었다. 누구나 하는 평범한 취미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과시할 취미가 아닌, 나를 힘든 시간에서 끌어올려주는 그 무엇인가가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면서 쓸 데 없는 생각들도 많이 떨어져 나갔다. 스트레스 해소법이라면 해소법이었다. 마냥 잊는 것이 좋은 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해결책이 딱히 없는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잊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폴은 그런 나를 이해 못 하곤 했다. 힘든 일은 잊어 버리려고 하는 나의 태도를. 그는 그 힘든 일을 대면하고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잊을 수 있으면 잊어버리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발레를 하면서 기분 좋아진 나는 다시 밝은 에너지로 가득 찼다. 어두움, 외로움을 다 땀과 함께 버리고 온 셈이었다. 그와의 알 수 없는 이 상황도, 관계도 상관없었다. 아마도 나는 이 때 아드레날린이 폭발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마냥 좋은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왔고 그에게 다시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발레 수업이 얼마나 좋았는지, 발레 선생님이 얼마나 예뻤는지, 또 거기서 만난 친구들은 어땠는지 등등. 마치 타이페이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밝고, 명랑한 내 모습이었다.


이 발레 수업에 온 것이 벤쿠버에 와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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