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낭콩 May 15. 2016

그러니 여행자는 다만 행복할 것

당신의 모든 여행은 옳다




짧은 여행에서 돌아왔다. 게을렀던 여행인 만큼 온 게으름을 다해 쓴다.


여행을 자주 한다. 나의 모든 떠남을 여행이라고 칭해도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때로는 일 더미 속에서 사무실 밖 풍경이 변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때도 있으니. 이름이야 무엇이 되었든 그 수많은 떠남 덕분에 이제 나는 주요 환승 공항들에서는 안내판을 보지 않고도 게이트를 찾아갈 수 있고, 자주 찾는 도시는 주소를 듣고 공항에서 내려 그의 숙소를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는 길을 다른 이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광적인 여행 매니아인 것은 아니다. 가끔씩 들어오는 제안들을 '나는 이제 더 이상은 외국인이고 싶지 않다'는 말로 거절하고,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때에는 온갖 핑계를 대며 빠져나갈 구실을 찾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짧은 휴가에도 주저 없이 비행기 티켓을 사고, 주말이면 계획 없이 낯선 도시로 떠나 외지인을 자처하기도 한다.


갑자기 베이징으로 떠난 것도 특별히 여행에 목말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프로젝트 하나를 마치고 '수고했으니 이제 다들 조금 쉬라'던 팀장의 말에 정말 '쉬기 위해' 용감하게 그 자리에서 일주일의 휴가를 냈다. 등 뒤에 박히는 동료들의 눈초리를 애써 모른 체 하며, 만일의 경우 '해외에 있어 연락이 어렵다' 정도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어디로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목적지가 베이징이었던 것도 순전히 그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 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날 저녁 출발하는 베이징 행 티켓을 구입해 집에 들러 3분 만에 여행 짐을 모두 싸고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호텔을 예약했다.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서는 물을 한 병 사들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 체크인을 하고 잠을 잤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떠날 수 있을 만큼 나에게 베이징은 더는 신기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곳이다. 베이징에 오면 찾는다는 천안문 광장은 서른 번쯤 지나쳤고 이미 이화원도 열댓 번은 구경했다. 다시 말해 때마침 열리던 베이징 모터쇼로 치솟은 방값을 감수하고 그 순간 내가 굳이 베이징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베이징을 찾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쉬고 싶어' 떠났던 여행인 만큼 거창한 계획이 있을 리 없었다. 덕분에 알람도 맞추지 않고 느지막이 일어나 오후 내내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며 음악을 들었고, 창 밖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크로키를 그리기도 했다. 면세점에서 사 온 화장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방을 어지럽혀도 괜찮았다.


어쩐지 아침 일찍 눈이 떠진 날에는 베이징 모터쇼장을 찾아가 신차들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대뜸 전시 요원들과 향후 전기차 시장의 판도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차를 살 사람만 들어오라던 오만한 람보르기니 전시 부스에도 당당히 차를 사러 왔다며 한 번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볕이 좋은 날 한량처럼 거닐다가 발견한 골동품 가게에 들러 중국 기념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장난감도 샀다. 이동할 때에는 주저 없이 택시를 탔지만, 버스를 타고 아무 곳에나 내려 하릴없이 걷기도 했다. 그러다 길을 잃기도 했다.


중국인 친구조차 '지저분하니 먹지 말라'던 길거리 음식도 사 먹었지만 비싼 식당에서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애써 먹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근처 마트에서 처음 보는 과자들을 한 봉지 씩 사 먹어 보기도 했고, 길거리 좌판에서 과일을 잔뜩 사들고 와 그것으로 끼니를 대신했던 날도 많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값을 묻지 않고 샀고 돌아와 계산해 보니 한국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싼 물건도 있었다. 도착 첫날 구입한 황사 마스크는 알고 보니 소위 말하는 '짝퉁'이었다. '문화 거리'에서 산 중국 인형은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목이 부러졌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 여행자에겐 무엇이든 괜찮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베이징은 어땠냐고 물었다. 자주 가던 과일 가게, 호텔 창 밖 풍경, 산책하다 만난 강아지처럼 특별할 것 없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이렇게 실컷 게으르고 좋았다고 답했다. 역시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다르네,라고 상대는 말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원래 그렇게 현지인 같이 지내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는 함께 웃었다.


'진짜 여행'이라는 말은 꽤 근사하다. 그리고 십여 년 전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얼마나 적은 돈을 들여 보고 왔는가가 좋은 여행의 척도로 여겨졌듯이, 아마 오늘날에는 여행지에서 얼마나 현지인처럼 지내다 오느냐가 새로운 척도로 여겨지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여행을 현지인이 되기 위해 떠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현지인일 테고, 그 현지인으로서의 삶을 잠시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법이니.


그래서 나는 조금은 식상한 여행이 좋다. 편안함을 보장하는 패키지여행도 좋다.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도 좋다. 도망치기 위한 여행도 좋다. 숨기 위한 여행도 좋다. 그저 즐기기 위한 여행도 좋다. 당신의 여행은 어떠해도 좋다. 여행의 방식은 무엇이 되었든 그곳에서의 순간들이 당신을 조금 더 행복하게 해준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여행이다.


그러니 여행을 떠나는 모든 이는 다만 행복하길.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빛깔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