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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낭콩 Feb 06. 2021

10. 외국어를 배워본 적 있나요?

언어라는 가면을 쓴다는 것

L을 만나기로 한 것은 Heim이라는 이름의 카페에서였다. 약속시간 10분 전, L에게서 자신은 먼저 '하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문자가 왔다. 곧 도착해서 L을 만난 나는 '헤임'이 아니라 '하임'이라고 읽나요? 하고 물었다. L은 그렇지 않을까요, 독일어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L은 글쎄요,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도요, 와 같은 표현들을 자주 쓰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고, 독일어를 할 수 있냐는 나의 물음에 '배워본 적은 있으나 잘하지는 못한다'라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메뉴판 안의 다른 메뉴들도 어려움 없이 읽어내는 그를 보며 물었다.


다른 외국어를 배워본 적 있나요?

할 줄 아는 외국어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외국어 공부의 목적이 궁금해요

외국에 살아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요


"글쎄요, 제가 배워 본 언어는 열댓 개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사실 잘할 수 있는 언어는 몇 개 안돼요."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베트남어, 따갈로그어(필리핀 지역어), 아랍어, 카자흐어(카자흐스탄 지역어), 스와힐리어(아프리카 지역어), 러시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등 자신이 배웠던 언어를 늘어놓는 그의 말을 끊고 "아니, 대체 그 많은 언어들을 왜 배우신 거예요? 그것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들을?"이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로서 조금 더 자유롭고 싶어서요."라는 L의 답변에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지는 않는 이야기라며 말을 이었다.  


L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학을 하던 중 영문과를 졸업한 일본인인 어머니를 만나서 결혼했고, 할아버지는 스위스에서 오랜 기간 거주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對 중국 사업을 하시는 할아버지 덕분에 집에는 항상 중국인 손님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조부모님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L은 그래서 어머니와는 영어로, 아버지와는 일본어로, 할아버지와는 프랑스어로, 할머니와는 한국어로, 손님들과는 중국어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날들부터 이미 5개 국어를 했다는 L에게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나의 페르소나를 하나 더하는 것이에요. 프랑스어를 쓰는 나와, 일본어를 쓰는 나는 표정부터 말투, 제스처까지 모두 달라요. 그리고 그것이 나를 자유롭게 했어요. 지금도 나는 시사지를 읽을 때는 프랑스어로 읽고, 생각을 할 때는 영어로 하고, 일기를 쓸 때는 일본어로 써요.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늘어난다는 것은 내가 편리하게 꺼내 쓸 수 있는 내가 늘어난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지금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있느냐고 묻는 내게 L은 그렇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유를 묻자 L이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오히려 지금은 나의 페르소나들을 정리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나는 너무도 많은 언어들과 페르소나 사이에서 자유로워서, 하나의 페르소나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내가 나로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슬픈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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