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직도 대기업으로 가야 성공이라 믿는가

경량문명에서 커리어의 질문은 달라졌다

by 이인서

https://youtu.be/vuB86L4fPy4



7년 전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디자인 에이전시 7년 차, 다음 발걸음으로 대기업 이직을 생각하고 있지만, 채용 자체가 드물어 지원할 곳조차 많지 않다고 했다.


나는 먼저 물었다.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니?"


잠시 머뭇거리던 학생은 말했다.

"독립해서 제 디자인 회사를 차리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꼭 대기업으로 이직을 해야 하는 거지?"


학생은 "대기업 커리어가 있어야 나중에 회사를 운영할 때 도움이 된다"라는 말을 믿고 있었다.



이름값이 목표가 되는 순간, 커리어는 흐려진다

한때 에이전시에서 대기업으로 옮기는 것은 디자이너에게 거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

"경력 몇 년 → 대기업 점프 →명함"이라는 공식이 있었다.

이 공식을 통과하면 커리어가 한 단계 올라간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먼저 대기업 채용 자체가 드물다. 공고가 뜨지 않으니 입구부터 좁다.

더 중요한 변화는 '이름만 대기업'인 부서가 늘었다는 점이다. 간판은 크지만 크리에이티브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자리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반복 업무, 하청, 유지 보수형 데스크가 대부분인 팀으로 이동하면 겉으로는 이직에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창의 근육과 문제 해결력은 빠르게 무뎌진다.


그래서 이직의 기준은 회사 이름이 아니라 '일의 성질'이어야 한다.

문제를 정의하고, 가설을 세우고, 디자인으로 해결을 시도하는 디자인센터/문제 정의가 가능한 팀. 이런 곳이 아니면 "간판은 남고 역량은 지는" 역전이 벌어진다.



이직이 막히는 건 '실력'이 아니라 '환경'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문제는 개인 역량의 결핍이 아니라 채용 환경의 구조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있다.

송길영 박사가 말하는 '경량 문명'의 흐름- 무겁던 체계가 가벼운 단위로 쪼개지고 더 빠르게 전환되는 구조-가 이미 현업을 뒤흔들고 있다.


이 변화는 먼저 업무가 잘게 분해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전엔 한 팀이 길게 붙잡던 일을, 이제는 AI와 자동화가 상시 동료가 되어 작은 태스크를 연쇄로 처리한다. 그다음으로는 필요 인원의 축소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같은 산출물을 내는데 사람이 더 적게 들고, 남은 인력은 문제 정의, 의사결정, 최종 품질 같은 고밀도 구간에 집중하게 된다. 이건 디자인 분야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업무 경량화 때문에 여러 산업 군에서 신규, 경력 채용 공고 자체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결국 이런 구조에서는 과거처럼 '좋은 타이틀'로 점프하는 방식이 더 이상 확실한 보증서가 되지 않는다.

간판이 커도 그 자리에서 크리에이티브가 일어나지 않으면 경력의 밀도는 빨리 희미해진다.

반대로 지금 통용되는 건 작동하는 증거다. 어떤 문제를 정의했고(Problem),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풀었으며(Process), 결과가 어디까지 바뀌었는지(Outcome)이 P-P-O 한 장이 간판보다 먼저 읽힌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건 '회사 이름'이 아니라 '일의 성질'에 맞춘 선택이다.

즉, 리서치-가설-의사결정-실험-검증이 실제로 도는 현장(디자인센터/문제 정의가 가능한 팀)을 기준으로 이직을 판단해야 한다.



회사 이름은 잊고, 자신의 이름을 남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회사의 이름이 아니라 너의 이름으로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해서 일을 봐. 미리 독립할 준비를 하는 거야."


여기서 말하는 독립할 준비는 거창할 것이 없다. 회사를 다니면서 아무도 모르는 내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직접 회사 없이 프로젝트를 A-Z까지를 수행해 보는 훈련을 미리 해보는 것이다.

핵심은 본인 명의로 책임을 지고 끝까지 완결해 보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 경험을 회사 안 업무에만 한정하면 안 된다.

회사 밖에서 직접 프로젝트를 수주해 보는 것이다.

외부 의뢰-계약-납품의 전 과정을 내 읾으로 굴리는 순간, 경력의 '간판'이 아니라 실제 작동 기록이 쌓이게 된다.


이 조언의 배경엔 우리가 사는 사회가 더 이상은 사람을 직함이 아닌 성과로 호명하는 시대가 있다. 무거운 조직과 긴 절차 대신, 작게 쪼개진 문제를 빠르게 풀어낸 개인이 더 자주 불린다. 누군가가 당신을 찾는 순간은 대개 직함 때문이 아니라 해결 기록 때문이다.


몇 달 뒤 학생에게서 소식이 왔다. 회사에 다니면서 외부 프로젝트를 수주해 함께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프로젝트 트는 크지 않지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설계를 주도하며 결과를 확인하는 루틴이 몸에 빠르게 붙었다. 그렇게 '내 이름'으로 작동하는 증거가 한 장 두 장 쌓이자, 변화가 눈에 보였다.

자신감이 올랐고, 급여 외 소득은 2배 이상으로 띄웠다.

대기업으로의 이직보다 더 큰 보상이다.


나는 그 지점을 '전환 신호'로 보았다. 회사 안에서는 여전히 총괄 역량과 협업 감각을 유지하고 회사 밖에서는 네임밸류를 '직함'이 아니라 '증거'로 증명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학생은 앞으로 채용사이트를 드나드는 것보다는 회사 업무와 자신의 개인 프로젝트를 꾸준히 수행하면서 독립할 준비를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채용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호명되는 사람

간판이 증명하던 시대는 저물었다.

사람은 더 이상 직함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소 호명된다. 그래서 커리어의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앞으로 채용은 더 드문 이벤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입구가 바뀐다.

입구는 채용 공고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남긴 프로젝트다.



디자인 수업신청은 아래의 게시물을 참고하세요.

일대일 과외수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별도의 개강일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수업스케줄에 맞춰 수시 모집으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inmayde/224055206098


1:1 디자인 수업에 대한 커리큘럼은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https://blog.naver.com/inmayde/224027243896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디자이너 수명은 짧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