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구름달팽이 글쓰기
어렸을 적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가난으로 이어졌다. 밥이야 먹고살았지만 문화적으로 빈곤이었음은 커서야 실감 났다.
창의성 좋은 아버지는 특허를 수없이 내느라 돈 버는 족족 특허청에 헌납했다. 밤늦게까지 발명품 도면을 그리고 그것으로 물건을 만드는 걸보고 자란 형제들은 다행스럽게 미술 쪽에 재능 한 줌씩은 갖고 태어났다. 손재주가 좋은 엄마와 새로운 것을 만들기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나 또한 손으로 조몰락조몰락 무언가를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뿐.
좀 커서 나는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혼자 외계에서 온 별똥별이었다. 어릴 적 누구나 읽은 안데르센 동화나 세계명작 소년소녀 문고 등 책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는 바가 별로 없었고, 그것은 숨기고 싶은 수치였다. 그 흔한 만화책조차 즐겨하지 않았던 나는 무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궁금했다.
'책을 좋아하지 않은 내 탓일까? 책 읽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부모님 탓일까?'
식자재가 좋아야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재료가 좋아야 튼튼한 집도 지을 수 있다.
독서의 부재는 맛없는 단어로 지어진 부실한 문장이 되었다.
글쓰기가 두려운 대상이었고, 써놓은 글들은 품위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문예부에 들어갔다. 빈약한 독서로 가진 것이 없었지만 문학이 그냥 좋았다. 문예부들원과 문집을 만들고 몇 날며칠 인근학교를 다 불러 시화전을 준비한다고 수업을 많이 빼먹었다. 성적이 뚝뚝 떨어졌다. 문학은 늘지 않았고, 원하는 대학만 내게서 멀어졌다.
원하지 않던 대학에 와서는 그 갈증을 교지편집부에서 풀어보려 했다.
교지 만들기 위해 취재 다니느라 왔소, 갔소 하다 보니 대학생활이 금방 끝났고 졸업이었다.
여전히 책과는 친해지지 못했다.
가수에게 '음색'이 있다면 작가에게는 '글색'이 있다.
작가만의 독특한 글색은 어릴 적 자연과에서의 경험과 살아온 과정이 결정해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양하고 많은 독서량은 성량에 견줄 '필량'이 아닐까?
고음ㆍ저음, 진성ㆍ가성, 발라드ㆍ헤미메탈을 넘나드는 성량은 노래를 주무르고, 어우르고 빰쳐 제멋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
독서량이 관건이다.
내 글의 부족함과 소재의 부재를 탓하기 전에 책부터 많이 읽어야겠다.
"많이 먹어야,
많이 배출할 수 있다."
불변하는 진리다.
하지만 가끔 변비로 고통받을 수 있다. 슬럼프라 여겨 포기하지 말자. 배출 못하던 고통은 쾌변의 즐거움을 배가 시킬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