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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May 08. 2024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책/형이상학 낭독과  본문 내용 정리

#책_형이상학_낭독_시즌1

#옮긴이_해제_읽기_그리고_부분발췌로_옮겨쓰기


* <형이상학> 책 낭독으로 읽기가 우여곡절의 예행연습 시간을 거쳐 비로소 5월 7일 '시즌1, 1회 낭독회'를 마쳤다.   어쩌다 보니 준비기간을 갖게 되었던 셈인데, 1회 낭독을 시작하고 다시 마치며 드는 생각은 뿌듯하다는 것이었다. 형이상학을 읽기 위한 예행의 시간을 잘 가졌던 것인가 보다 싶었다. 형이상학 책과 친해지는 시간이었는가 보다. 너무 먼 과거의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재의 우리에게로 오는 시간은 가깝고도 먼 당신이었다.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테제들은 구조론의 테제들과도 비슷하여 강한 기시감을 형성하였다. 고대의 형이상학이 현대의 구조론으로 변양 된 느낌이랄까? 어쨌든 형이상학의 용어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여하튼 서양 현대 철학은 그 이전의 철학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이전의 철학자들과 연결된다. 그런데 <형이상학> 책을 보니, 모든 서양 철학의 출발점은 바로 이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괜히 서양 철학의 출발점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서양 철학자들의 모든 테제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범주를 넘어서지 않고 있다고 보인다. 또한 철학적 논리학적 책 서술 방식도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결국 <형이상학>을 읽어야 한다.


우리(다경, 연수, 아란도)는 읽는 도중에 어떤 설렘과 함께 재밌다는 느낌을 공통으로 받았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읽는 것을 듣고 집중하며 한 시간 반을 잘 보낸 것이다. 잘 듣고 잘 집중하면 설레고 재밌고도 즐거운 감정이 자기 안에서 생성된다. 또한 무엇보다 책의 내용이 사람에게 귀를 쫑긋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갈구하던 어떤 목마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래는 1회 낭독 '옮긴이 해제' 단락에서 내가 읽었던 부분을 옮겨 보았다.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는 그다음 장 범주분류와도 연결된다. 이 문장 자체가 범주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낭독 시작된 앞 장부터 차례대로 정리하면 좋겠지만(그 부분은 차차로), 오늘은 내가 읽었던 내용에서, 부분 부분을 연결하여 요약한 것을 올린다. 매주 낭독 후에 정돈을 해볼 생각이지만 매번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간 되는 대로 요약 정리해 볼 생각이다.


현실태와 가능태, 현재 책을 읽는 우리 그 자체와 읽고서 그것이 우리 안에서의 어떤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철학적 사유들, 그  사유들이 벌써 터 그리워진다.


낭독 풍경/ 탭에서는 그 자신은 콩알만하게 보인다. (1회 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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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책 본문 p604~607> (1)



3. 존재론과 실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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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형이상학의 학문은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을 고찰한다.  있는 것을 다룬다는 점만을 떼어놓고 보면 이 학문은 다른 학문들인 수학이나 자연학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 어떤 학문도 있지 않은 것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의 대상을 일컬어  단순히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고,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이라는 제한적인 문구를 사용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있는 것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모든 학문이 똑같지만, 수학적인 학문들은 있는 것을 양적인 관점에서, 자연학은 있는 것을 운동과 변화의 관점에서 다루는 반면, 형이상학은 있는 것을 다른 어떤 제한된 관점이 아니라 오직 '있음'의 관점에서 '무제한적으로(haplos) 다루며, 바로 여기에 형이상학의 고유성이 있다는 말이다.*


* '있는 것'과 '있음'은 각각 그리스어 'on(being)'과 'einai/이니 (to be)'를 옮긴 것이다. 이 두 낱말은 보통 '존재자'나 '존재'로 번역되곤 하는데, 여기서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말 번역어를 택했다. (...) 'on'은 '있는 것'과 '~인 것'을, 'einai'는 '있음'과 '~임'을 뜻한다. (...)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라는 테제도 " '~인 것' 혹은 '~이다'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라고 옮길 수 있다.


_____


아리스토테레스는 '있음' 그 자체의 관점에서 '있는 것'을 다루겠다는 의도를 천명한 뒤에 '있는 것(~인 것)' 또는 '있음(~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어떤 것이 '있다' 혹은 '~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 말을 한 가지 뜻으로 사용하는가, 아니면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론적 탐구에 이 물음을 앞세우는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분명한 대답 없이 있는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은 목표를 확정하지 않은 채 찾아 나서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있는 것' 혹은 '~인 것'의 의미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탐구의 출발점을 이룬다.


그리고 이때 '있는 것' 혹은 '~인 것'의 의미구분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그리스어 동사 'einai'의 다양한 쓰임이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형이상학 5권 7장에서 소개된다.


"X는 Y이다"라는 형태의 단순한 진술 속에서 '~이다'가 쓰이는 방식을 실마리로 삼아 그 의미를 구별해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 사람은 음악적이다" : 이 음악적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우연적인 일이다. 음악적 교양은 그에게 속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음악적이다'는 '부수적인 뜻'에서의 '~임' 또는 '있음'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음악적이다"와 같은 내용을 표현하는 "X는 Y이다"는 "X는 우연적으로(kata symbebekos) Y이다"라는 뜻을 갖는다.


(2) "사람은 실체다" 또는 "하양은 성질이다" : "X는 Y이다"는 외면적 형태만을 놓고 보면 (1)의 경우와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이 표현하는 내적 사태는 완전히 다르다. 사람이 우연적으로 실체인 것도 아니고, 하양이 우연적으로 성질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자체로서(kath' hauto)' 실체이고, 하양은 '그 자체로서' 질이다. 이런 뜻에서 위의 두 진술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존재(on kath' hauton)' 또는 '본질적 존재'이다.


(3) "소크라테스는 교양이 있다" : 이 진술 역시 "X는 Y이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진술은 "소크라테스는 교양이 있다는 것이 참이다"의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어 동사 'einai'의 용법에서 보면 직접 드러난다. 'esti' 또는 'ouk esti'가 문장의 첫머리에 올 때 그 표현들은  각각 "X는 Y라는 것은 참이다"라거나 "X는 Y라는 것은 거짓이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동사 'einai'의 이런 쓰임에 비추어 '있는 것'에는 '참이다라는 뜻에서 있는 것(on hos alethes)'도 포함될 수 있다.


(4) "헤르메스 상(像/형상 상)이 돌 안에 있다"와 "반선(半線/하프 라인/반으로 나누어 한가운데에 그은 선)은 선線 안에 있다" : 헤르메스 조각상이 현실적으로 돌 안에 새겨져 있을 때뿐만 아니라 돌을 쪼아 헤르메스 조각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도 "헤르메스 상이 돌 안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진술은 "헤르메스 상이 현실적으로 돌 안에 있다"는 뜻으로도, "헤르메스 상이 돌 안에 가능적으로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반선은 선 안에 있다"라는 경우도 비슷하다. 이로부터 '~이다' 혹은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것(on energeiai)'과 '가능적으로 있는 것(on dynamei)'으로 나뉠 수 있다.


이런 분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존재론의 핵심적인 테제인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에 이르고, 이 테제를 자신의 존재론적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그의 존재론이 '있는 것'의 의미에 대한 아무런 사전분석 없이 단순히 "있음은 있고 없는 것은 있지 않다"라는 전제 위에 존재론을 구축하려는 파르메니데스의 시도나 그와 같은 유형의 존재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있는 것'이 이렇게 네 부류로 나뉘어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들 모두가 형이상학의 탐구 대상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개한 위의 네 부류의 의미 가운데 <형이상학>의 고유한 탐구 대상은 (2)와 (4)뿐이다.


 (1)의 뜻에서 우연적으로 있는 것은 학문적 탐구에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 배제된다. 우연적으로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확정된 원인이 없으므로 학문이 추구하는 확정적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3)의 뜻에서 있는 것인 참과 거짓이라는 뜻에서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은 오직 인간의 사고(dianoia)를 떠나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배제된다. "참은 주어와 술어가 실제로 결합되어 있을 때 이를 긍정하는 데서 성립하고 그것들이 분할되어 있을 때 부정하는 데서 성립"하는데, 이런 결합과 분할의 사태는 자연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 안에만 있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탐구에서 배제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 그 자체로서 있는 것과 가능태 혹은 현실태라는 뜻에서 있는 것만이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탐구의 두 영역으로 남는다.


표지그림/ F.신켈(1781~1841)의 '모짜르트의 마술피리를 위한 무대화/1815'


#형이상학_저자_아리스토텔레스_역자_조대호_도서출판_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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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그림/ G. 다 크레모나(1451~83) '토론 중인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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