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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Jun 04. 2024

'humming과 예술 작동 원리'

이런생각_허밍에_대하여/ 비극의 탄생과 예술의 두 원리

#이런생각_허밍에_대하여  'humming과 예술 작동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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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보다 글이다. 아마도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하여 즉자적으로 전달되는 본능적인 어떤 것을 붙잡아서 썼기 때문일 것이다. 붙잡은 그 감정을 글로 써놨고, 글은 앞과 뒤를 문맥에 따라서 문장을 재정돈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하여 다시 말로 옮기는 과정은 뭔가 '앙꼬 없는 찐빵'처럼 공허함을 준다.


어쩌면 이 과정은 메커니즘에 관한 것인데 간단한 말로 그것을 다 표현해 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전달하고 싶어서 말로 축약하지만, 오히려 공허해질 뿐이라면, 그것은 축약될 수도 없고 생략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말로 설명하면 모호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 느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말이 모호한 것이 아니라, 그 메커니즘에 대하여  타인에 대해서는 용감하게 전진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신체 작동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신체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은 같다. 다만 주의를 얼마나 두느냐의 문제이고, 철학의 문제는 모두 인간 감정의 근원인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인데, 타인이 그것에 대해 주의를 두지 않거나 예민하지 않아서 똑같이 보유한 기능에 대해 알아차린 것을 설명하는 데 용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 하거나 또는 강요가 될 소지를 미리 염두에 두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철학자들의 이런 문제를 소급하여 나 역시 어떤 현상을 만드는 메커니즘에 대해 용기 있게 써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긴 철학책들이 필요했던 것이겠지만, 짧게 쓰거나 말한다고 해서 모두 알아먹었다면, 그 누구도 철학책을 읽고 있지 않을 것이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글만큼 말로도 그만큼 길어야 하지만, 말은 글만큼 늘어나지는 않는다. 말이란 약간은 두서가 없기 때문이고, 어느 정도 말로 그 내용을 정돈하여 반복하는 훈련적인 방법을 거치지 않으면,  그 내용이 말속에 제대로 담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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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허밍에 대하여' 문득 그 전해오는 느낌을 붙잡아서 쓴 것이다.


허밍은 장엄미사곡이다. 허밍은 내 안 깊은 곳에서 나오는 분위기 잡힌 음악이다. 이 분위기 잡힘은 어떤 경건함이 있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소리로 나오는 허밍에는 어떤 정서가 있다. 그 허밍을 문득 감상하고 있는 나를 지각한다. 그리고 그 정서를 따라 들어간다. 그것은 어떤 근원 운명에 대한 감각이기도 하여 슬픔이 그 배경을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서 흐르는 한줄기 어떤 피어남은 긍정이며 희망이며 받아들임이며 동화이며 일체가 되는 어떤 감정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지만 빛처럼 툭툭 튕기듯이 솟아나며 퍼진다. 그런데 넓게 확산이 아니라 하나의 줄기 형태이다. 그 형태를 유지하며 떨어져 나온 '빛'방울은 그 주변으로 스며든다. 그런 반복적인 모습이 영상처럼 내 안에서  그려진다. 그렇게 송출된 영상의 느낌은 고요하지만 벅참이며, 벅참이지만 요란한 요동침은 아니다. 그 한줄기는 박동처럼 튕기듯이 피어나지만, 뜨거움은 아니다.


베르그송이 말한 생명에너지는 바로 이것일까?

근원적인 정서가 음악으로 표출되는 형태가 허밍이 아닐까. 허밍이야말로 인간이 음악적 인간이란 단적인 증거가 아닐까.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음악'이 근원이라 하였다.

시적 표출은 이 음악적 힘에 의한 것이다.

비록 허밍이 소리로 나오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분위기 잡힌 정서, 음악적 정서에서 슬픔을 먼저 느낀다. 허밍에는 그런 분위기 잡힘을 내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독한 감정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정서에 대해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일까? 사람은 그 자신의 생을 살면서 외로움에 부딪히게 되는데,

힘이 들면 더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은 고독이 버거워서 의지할 대상을 찾는데 주변 사람이나 특정한 사람이나 동물 또는 사물에 꽂기도 한다. 그런데 니체의 말처럼 일시적 위안이 아니려면 자기 내면과의 어떤 만남을 조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럴 때 사람은 그 자신이 맺는 모든 관계성에서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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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이러한 '허밍 현상'을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허밍의 뿌리는 깊고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다. 허밍은 어떤 정서에 기반해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인어 공주'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그 그림 형태는 허밍의 뿌리와 유사하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표현할 때 그 자신이 지각하거나 느낀 형태에 비추어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자기 안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영화적 표현에서 보다 더 무수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런데 보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고 여기게 된다. 연출되고 각색되고 객관화되어 나타나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한 변형은 바로 다양한 작품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음악이며 글이고 그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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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 대해서는 예도샘 유튜브 강의를 최근에 들었다. 베르그송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은 허밍처럼(등등) 나의 체험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한편으론 내가 알고자 했던 것들이 점점 하나의 꼭짓점을 향하여 모지는 것 같다는 생각 역시 든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 휴식하고 싶다는 생각과 싸우고 있다. 많은 것들이 점점 복잡성을 벗어나 단순해지고 있는 반면에 나는 어느 정도의 나른함이 나를 채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내 안의 '하기싫음'은 어쩌면 너무 많은 것들이 펼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딴은 그렇다. 어디서부터 손을 움직여야 할까. 정신 모으는 것도 에너지 그 자체가 소용되는데 말이다. 나 자신에게 내가 합창단이 되어 주어야 한다.


허밍은 어떤 정서에서 비롯되고 그 정서는 분위기 잡혀 있다. 허밍의 뿌리를 타고 들어가 보는 감각적 훈련은 그 자신의 어떤 상태를 살피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물론 모든 허밍이 다 같은 의미를 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의 그 상태에서는 선과 악은 없다. 단지 어떤 조건이 맞아서 그 상태에 도달하면 본능적으로 안에서 올라오며 멜로디로 전환되는 것일 것이다.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허밍의 분위기 잡혀있음은 어찌 되었든 정서적인 기분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허밍이 나올 때는 지극히 침착하고 차분한 상태라고 보인다. 그 상태는 들떠 있는 상태기 아니라 가벼운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어떤 판단이 이미 작용한 후이므로, 이 상태 역시 무엇인가에 몰입된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에 의하여 어느 방향에 의해서 근원과 연결되었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까? 모를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감정을 느끼지만, 그것에 대해 쓴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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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아침놀>을 낭독회에서 읽다가, 아침놀은 <선악의 저편>의 '전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가 문제시했던 것을 전면화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도덕의 계보를 읽기 전에 도덕에 관한 두꺼운 어떤 책을 읽어 보고 싶었는데, 아직 손도 못 대었다. <도덕의 계보> 역시 이해하기 좋은 <아침놀>이라는 생각을 했다. 니체가 문제시했던 '도덕'은 참으로 그 당시에도 지금도 대단한 지적이자 건드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러한 지점이 서양철학사에서 니체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분기점이 된 것일 것이다. 인간에게 '죄'와 '죄의식'만한 감옥도 없을 것이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인간은 죄의식을 만들어 내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죄의식은 결국 도덕을 만들어낸 것과 같다. 공동체에 필요한 도덕과 인간 개인을 결박시키는 도덕은 구별해야 한다는 울림으로도 다가온다. 도덕의 붕괴가 아니라 결박의 도덕을 파기시킴으로 인해서 오히려 도덕을 회복하는 것일 것이다.


개인은 집단에 비하면 미약한 존재다. 그러한 개인을 옭아매는 도덕은 개인에게 집단의 문제를 책임전가시키는 행위다. 집단 안에서 용해되어야 하는 문제를 개인에게 부담시키지 말아야 한다. 개별적인 존재는 미약하니까 먼지처럼 오히려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티끌이기에 오히려 쉽게 떠도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잘 사유한다면 집단은 더 강해질 수 있다. 도덕은 그렇게 소용되는 것이지, 개별자들의 자유의 총량으로 도덕이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개별자들의 자유가 크다할지라도 집단을 넘어서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독재이며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집단이 소멸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허밍과 도덕은 벌로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허밍과 도덕은 상관관계가 깊다고 생각된다. 근원적인 것과의 조우를 도덕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시키며 도덕으로 각인시킨 것인데, 단박에 그것을 허물어 버리는 허밍과 같은 무의식적 분출과 충동들은 도덕에게 있어서는 단연코 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더 많이(기울어진 저울추의 균형이 어느 정도 맞아질 때까지는) 허밍적으로 살아갈 때, 도덕의 무계는 가벼워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자유정신일 것이다. 니체의 생애는 종교적 도덕과 투쟁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적 음악과 미사는 어쩌면 인간 안에 이미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경건하고도 평정한 기도 상태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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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이 일어나는 과정을 되새김질해 보자면 이러하다. 허밍은 여럿이 있을 때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 자신이 무엇인가에 몰입상태에 있거나 어떤 기분 상태에 있을 때에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그 멜로디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단순한 멜로디를 반복적으로 흥얼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이 느낄 때는 상당히 풍부하게 느껴진다. 거기에는 어떤 정서가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분위기 잡힘 안에서 멜로디는 어떤 세계를 보여준다. 아마도 작곡가라면 이 멜로디를 악상으로 옮겨 적을 것이다. 나는 그 대신 글로 써보는 것일 테고.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 문득 의식이 눈을 뜬다. 그러면 그 흥얼거린 멜로디의 감흥은 멀어지지만 아직 여운은 남아 있다. 그때 흥얼거리고 있는 그 멜로디를 반복해 본다.    여운에 의하여 그 흥얼거림은 분위기 잡혀 있고 어떤 정서 상태를 내포하고 있으며, 차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뜨겁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면 허밍은 차가운, 또는 이성적인 상태에서 일어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허밍은 그 자신이 읽은 어떤 상태에 대하여 '받아들임'의 마음 상태를 인지한 후 일어나는 어떤 심리상태가 아닐까. 허밍은 어떤 의지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침착한 펑정을 가져오는 허밍에 대하여 보통 사람들은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기분을 쉽게 망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에도 심각한 오류이지 않을까?


허밍의 상태는 어떤 결심이 서 있는 상태다. 음식을 하고 있다면 '제대로 해야겠다' 또는 과정을 즐기는 상태의 몰입에  빠져 있음이다. 이것은 고도의 무의식적 집중 상태다. 이때 기분을 망치면 심각한 타격이 된다. 오히려 누군가의 허밍상태는 기분좋음으로 비치기에 오히려 위험한 상태다. 어떤 완전무결한 상태를 체험하는 중이어서, 그것이 깨지면 더 고통받는 것이다. 이때 오류가 발생하면 그것은 치명상이다. 쾌 상태가 어그러지면 오히려 더 심한 불쾌 상태로 바로 직행하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과 사물의 관계일 수도 있다. 기분잡혀 있음은 극히 아슬한 상태다. 그 기분에 동조할 것 아닌 이상은 거리감을 두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기분좋음은 이미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중이고 그것에 대해 객관적 태도로 관조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관조 상태가 오히려 내면에서는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수용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태가 깨지면 더 큰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 큰 불쾌감에 빠지게 된다. 그리되면 관계가 붕괴되기도 한다. 이러한 허밍 상태는 아마도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비유하자면 아폴론적 예술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허밍 상태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충동으로서의 예술적 충동과는 또 다른 관조에 가깝기 때문이다. 허밍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그 자신은 어떤 영상을 보고 있다. 그러니까 그 자신은 그 영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자신 안에서 허밍(콧소리로 흥얼흥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상태가 관조적이고 객관적이라면, 충동적으로 분출되는 예술적 충동으로서의 음악은 불꽃의 솟구침이다. 이 상태를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비유하자면 아폴론적 예술과 다오니소스적 예술의 결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허밍의 뿌리는 누구나에게 찾아올 수 있는 관조상태이며 환희다. 아폴론적 예술의 특성에서 음악적 요소가 결합된 것이 디오니소스 예술일 것이다. 그렇다면 관조와 음악의 결합은 '허밍'이 아닐까?


이 관조가 바로 내가 본 송출된 영상의 한 모습이다. 니체는  관조에 디오니소적 충동이 결합되었을 때 음악이 드러난다고 본 것일 것이다. 관조가 어떤 환영상태의 영상(그림)이라면, 음악은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소리이다. 그 음악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 방식으로 말하자면, 근원적인 일자의 목소리일 것이다. 근원적인 일자는 개별화의 고통을 앓고 있다. 그리고 음악은 그 일자의 고통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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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가 드러나는 과정은 어떠할까? "저녁놀이 찬란하게 아름다우려면 태양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내내 대지를 달궈야 한다" 이 문장에 대입하여 보자면 이러하다. 이 문장이 내포하는 의미는 '고통'에 관한 것이다. 고통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의미다. 고통은 어쩌면 '고대 그리스 비극 합창단'이 분위기를 극도로 고조시키는 바로 그때, 무대 위에 등장하는 '가면 쓴 사람'에게 디오니소스를 투사시키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용도일 것이다. 그때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은 일체감을 경험한다.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위의 저 문장의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그리스 합창단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그 역할 역시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행위'이다. 합창단의 역할 그 자체가 바로 고통을 상징한다. 이 고통의 힘으로 어떤 관문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평정(일자)에 도달한다.


먼저 뜨겁게 달궈야 하는 이유는 어떤 막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켓이 대기권을 벗어나려면 단번에 솟구치는 엄청난 가속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막을 넘어서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비극 합창단의 역할도 바로 그 힘을 만드는 동력원일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소포클레스부터 변형되기 시작한 합창단 축소에 대해 씁쓸함을 느꼈던 것이며, 에우리피데스에 와서 비극이 소멸했다고 통탄한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근원으로 가는 동력을 만드는 기능을 해체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후로 연극은 리얼리티만 남게 된 것인지도. 비극을 나름대로 이어가고 있었던 형태가 오페라였을 것이다. 니체가 한때 바그너에 열광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그리스 비극을 온전하게 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그리스인이 그들 자신이 만든 완전무결한 장난감을 그들 자신이 쉽게 망가뜨렸다고 보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서 무의식적으로 허밍이 나오는 이유 역시 그 이전에 어떤 대지를 뜨겁게 달군 어떤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받아들임' 상태 역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사람에게는 그 자신의 어떤 행로 또는 여로가 그 자신에게 대지를 뜨겁게 달군 시간에 해당될 것이다. 이 지속에 의하여 문득 허밍이 나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받아들임에서 어떤 의지가 솟구친 것이며 그것이 '충동'이며, 충동의 힘에 의해 허밍이 나오는 것이며, 그 목소리로 흥얼거리는 멜로디는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지만 그 자신을 충분히 매료시키며 관조상태에 머물게 한다. 대체로 명곡의 멜로디는 슬픈 가락을 품고 있다. 이 멜로디의 복제와 변조로 우리가 듣는 음악이 탄생한 것일 것이다. 니체는 이 멜로디의 집단적 기원과 기억을 '민요'로 보고 있다. 허밍에서 비롯된 멜로디는 민족적 집단의 어떤 정서를 반영한다. 이 민족적 힘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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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힘  또는 대지를 뜨겁게 달군 그 시간에 의해 어떤 막을 문득 '순간'에 넘어서서 도달한 곳, 바로 그 장소에서 결합한 상태가 물아일체 상태인데, 이때에 어떤 큰 슬픔을 경험한다. 개별화로 고통받는 일자의 슬픔이다. 그렇지만 하나 되는 것(주관적 주체)과 그 자신이 그 상태를 지켜보고 있는 객관적 관찰자 상태는 또 다르다. 주관적인데 객관적인 그 느낌과 그 송출 영상. 자신이 느끼면서 자신이 그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은 모두 동일한 것인데, 뇌는 영상을 띄워 그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종의 해석하기 좋도록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이해하기 좋도록 말이다.


일체가 되었을 때 슬픔의 정서 안에서 올라오는 환희가 있다. 일체가 되어서 전달되는 기쁨이자 사랑이다. 바로 그것이 '충동'으로 솟구치며 멜로디로 송출되는 것일 것이다. 멜로디 송출 상태는 어떤 환영의 상태이기도 하다. 동시적이다. 환영으로 분위기 잡힘 상태의 공간감과 정서를 모두 지각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일 것이다. 환상적인 기분을 느끼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 허밍이 올라오면서 음악적 상태의 환영을 보게 하고, 이 환영이 남긴 여운이 예술적 영감의 모티브가 되는 것일 것이다. 받아들임 상태에서만이 근원적 일자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어떤 막을 넘어서서 깊게 도달하여 만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 상태에서 느끼는 정서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그리고 이해 그리고 어떤 깨달음, 그런 것일 것이다. 형이상학적 예술 '허밍'과 '웃음' 그리고 '미소'. 그런데 이것은 '허밍' 안에 다 포함된다.


허밍은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원리를 본질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이 결합되었을 때 인간의 심리와 감정을 더 파악할 수 있다고 보인다. 그것은 바로 '힘-동력'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허밍을 이렇게 니체의 <비극의 탄생> 예술의 두 원리에 비추어 내 생각을 풀어보았다.


니체는 인간의 이러한 메커니즘을 그리스 예술과 신화에 비추어서, 그 자신이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 이름을 지어 명명하였고, 이 두 예술을 결합하여, '예술의 두 원리'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하여 탐구한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미를 지각하고 영감을 얻고 또한 예술적 행위와 예술 작품을 생산해 내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예술, 비극은 '원형'이다. 원형은 어떤 것을 추적하는 단서를 간직하고 있다. 이 단서를 통하여 원리를 발견한 것일 것이다. 인간 안에서의 예술 작동 원리에 대한 책이 바로 <비극의 탄생>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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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니체의 <비극의 탄생> 풀어쓰기 연재 25화에서 캡처한 글들과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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