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봉투 절반 잘라서 담아 놓은 보이차(산차 형태)를 꺼내 보았다. 원차에서 해괴해 놓은 차일 것이다. 아니면 소분하여 나눈 차일 수도 있다.
아무 표기 없이 편지봉투 안에서 계속 잠을 자고 있었던 차이다. 내가 편지 봉투에 차를 담아서 보관했다면, 그때에 이 차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차였을 수도 있다. 또는 시음용으로 보관했던 차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표기가 없는 차는 나에게는 드문 일이다. 그리고 소분용 비닐봉투를 사용하지 않고 편지 봉투에 넣었다는 것은 적어도 2007~6년 이전을 의미한다.
그때 내가 엽저 상태를 보려고 편지 봉투(또는 봉투를 만들어서)를 잘라서 엽저들을 담은 후 수십 개씩 만들어 보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 이사하면서 다 버렸지만. 그 당시에 소분된 차들을 보관하기에 편지 봉투가 유용했었다. 그 후로는 한지(순지)를 구입하여 봉투를 만들어 보관했었다. 그러다 그 후에는 소분된 차들을 소분 비닐봉투나 소분용 차봉지에 담았다.
이 차의 마른 잎 상태와 엽저 상태를 보면 대지차일 확률이 높다. 대지차는 운남성(윈난)에서, 비교적 해발이 낮은 지역에 넓은 차밭을 조성하여 찻잎을 수확하기 편리한 형태로 재배하는 차나무를 가리킨다. 우리나라 보성 차밭을 연상하먼 된다.
시간이 제법 흘러서인지 차는 밝은 갈색빛을 띤다. 맛은 깔끔한 편이고 맑은 편이었다. 향도 숙성향이 났다. 개인적으론 그 당시에 이무 차가 많이 유통되었고 이무차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관차의 맛을 괜찮다고 느낀 것은 그 무렵이 조금 지난 후였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차는 대지차이고 이무 차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 이무나 맹해는 양대 차산이었고, 대지차를 많이 생산했다. 요즘은 눈에 보이차 대중성에서 대지차는 많이 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많이 유통되고 있다. 대지차는 오래 보관해도 별 효용성을 기대할 부분 없다고 생각한 것이 그 당시도 지금에도 거의 정설이다.
대체로 병배(여러 방식으로 모차를 비율적으로 혼합해서 차를 만들어 내는 방식)를 하여 맛을 조절한다. 이 병배는 각 보이차 회사마다 혹은 보이차 차농마다 약간씩은 다를 수 있다. 그들이 맛을 내고자 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세 번 정도 우려 마실 분량이길래 세 번을 시음하였고 우려 마셨다. 이로써 이 차는 사라졌다. 다음에 다른 곳에서 마신다고 하여도 기억이 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차라도 어느 지역에서 보관하고, 어떤 장소에서 우리는가에 따라서 차맛의 차이가 날 때도 많고, 또 누가 우리는가에 따라 차맛의 차이가 나기도 한다. 차는 정말 딱! 이거다라고 할만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정말 즐겨 마시고 그 자신에게 각인된 특정 차가 아니라면, 차는 이름과 년도가 없으면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는 그냥 차(단지, 어떤 종류의 차이고, 어떤 잎을 사용했는지, 보관방법이나 탕색과 엽저에 의해서 구별을 하게 된다)일 뿐이다. 잘 익어서 맛이 좋으면 잘 마시면 되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
소분된 상태로 보관된 보이차를 간혹 시음하지만, 어떤 차는 맛이 숙성되거나 더 나아진 차들도 있고, 큰 향상이 없는 차들도 있다. 소분된 차들은 대체로 그 변화 추이를 관찰할 용도로 보관했던 차들이다. 그러니 한 두 번 우릴 분량의 차들도 몇 년씩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시음 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시음들의 경험이 바로 의식에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모두 기억 어딘가에 내장되어 있다. 어쩌면 이런 기억들은 모두 감각으로 응축되는 것일 수도 있다. 집약되는 것이라고. 나는 내 시음방식을 오래전에 그 방향으로 정했었던 것 같다. 다 외우려고 하지 말고 감각에 저장하자! 이 방식이 그때의 나에게는 더 수월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생산 원료와 보관 상태 그리고 우리는 방식 등에서 그 차가 가진 특성을 잘 드러내 준다면, 그 기준으로 차를 품할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초기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 나중은 각각의 기호가 된다. 이 초기 조건이 품하는 데 기준이 될 것이다. 그 후에는 보관하는 방식과 그 차가 가진 변화 추이이다. 그런데 보이차는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차가 몇 십 년 지나 보니 좋더라 하는 경험을 가지고, 그 차를 다시 그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 봐야만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이 이만큼 어느덧 흘렀고, 차는 혼자서 익었다. 그 당시에 무슨 생각으로 편지 봉투에 담은 차를 그 후에도 열어보지 않고 계속 방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서 잘 익은 차를 마셨다. 그러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