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Car)가 아닌 차(Tea)
대학생 때 코딩동아리를 하며 처음엔 언제나 그렇듯 형식적인 자기소개를 쓰고, 팀끼리 공유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 : ______'
이라고 쓰여진 칸에 꽤 많이 고민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뭘까.
새로운 자리에서 단골인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란 질문은 참 모호하다. 가족, 친구와 같은 내가 소중하 여기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빵, 초코렛 처럼 먹는 취향, 또는 요가와 같은 취미생활일 수도 있다. 혹은 누워서 책읽다가 잠들기, 멍때리면서 걷기 처럼 동사일 수도 있다.
여기에 무엇을 써야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내 옆에 앉아있던 3학번 선배 언니는 '홍차'라고 썼다.
좋아하는 것이 커피, 술, 콜라도 아닌 '홍차'라고 적은게 당시 나에겐 굉장히 특이하게 다가왔다.
요즘에야 홍차 종류가 많아지고 즐겨먹지만, 당시에는 아마드 (Ahmad), 트와이닝스 (Twinings), 포트넘 앤 메이슨 (Fortnum & mason) 이런 홍차 브랜드도 시중에 잘 보기 어려웠다.
이어서 그 언니는, 차(Car)를 좋아하는 남자보다 본인과 차(Tea) 즐길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이때 문득 자동차를 굉장히 좋아하던 내 첫 남자친구가 떠올랐다. 그는 꽤 좋았다. 눈이 예쁘게 생긴 그는 다정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여느때처럼 길을 걸으며 시덥잖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뭐 예를 들면 붕어빵은 꼬리부터 먹어야한다 그런 별 의미없는.
그래서 무슨주제였는지 생각도 안난다. 그때, 나는 그냥 장난치고 싶어서 '붕어빵을 머리부터 먹으면 돼~ 안돼~' 와 같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정색하더니 30분동안 말없이 화난 표정으로 걸었다. 시간이 지난 후 '설마 나를 가르치려고 한 건 아니었지?'라고 물어보더라.
그가 말이 없던 동안, 나도 이전의 기억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졌다. 만나던 초반에 했던 말의 대부분이 본인은 어떤 여자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였고, 나머지는 내가 어떤 '여자'냐 였다.
잔소리하는 여자가 너무 싫다. 여자는 긴머리여야지. 여자는 나긋나긋하고 조용해야지. 하얀 여자가 좋다. 소리지르는 여자는 정떨어진다. 뭐 그런 얘기들이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에게 적합한 여자인지 확인하고, 나를 말잘듣는 여자로 만들려 했던 것 같다.
그일이 있고 몇달 후 헤어졌다. 그는 도대체 헤어진 이유를 모르겠다고 친구한테 물어봐달라고 그랬다더라.
생각해보면 본인이 자동차를 고르듯이 나를 바라본게 아닌가 싶다. 연식, 옵션, 색깔, 소음 등 본인의 취향에 맞게 선택하고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 생각했나보다.
나도 어쩌면 그 언니처럼, 멋진 차를 모는 모습과 차에 대한 지식 자랑을 듣는 것보가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시간을 갖기를 원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