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넷플릭스 글로벌 1위를 기록한 '이쿠카사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이쿠사가미, 전쟁의 신' (Last Samurai Standing)이 글로벌 1위를 차지했다. 과거 '유유백서'나 '아리스 인 보더랜드' 같은 일본발 대작들이 '글로벌 비영어권 TV' 부문에서는 1위를 달성했지만, 영어권 작품까지 포함한 '통합 글로벌 순위'에서는 아쉽게 2위에 머무른 바 있다. '이쿠사가미'의 성과는 이 장벽을 넘어섰다. 물론 일본 원피스(One Piece)의 실사 버전이 1위를 기록한 적은 있다. 그러나 원피스는 미국이 생산한 것이니, 순수하게 일본 작품으로는 이번 ‘이쿠카사미’가 처음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오징어 게임이 있듯 일본엔 이쿠카사미가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치부하기엔 여러 가지 살펴볼 지점들이 좀 있어 보인다. 일본의 전통적인 콘텐츠 시장이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자본을 만나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 연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장된 해석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은 일본 콘텐츠 시장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청사진일수도 있다.
어쩌면 진부한 소재다. 일본인들에게 메이지 유신은 특별한 시기다. 단순한 사극의 무대가 아니라 '구시대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격동기'라는 독특한 상징성을 지닌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고 러일전쟁 등에서 승리하며 세계 강대국 반열에 올랐던 '첫 번째 영광'의 시대다. 일본 보수가 가장 기억하고 싶고 되돌리고 싶은 바로 그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 그러나 시대극에서 다루는 메이지 유신은 항상 청산을 다룬다. 그러기에 신구의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그래서 가장 드라마틱한 소재다. 우리가 조선 개국을 다루고, 영정조시대를 다루는 것과 흡사하다. 일본의 전국 시대만큼이나 가장 강력한 소재이기도 하다.
사무라이는 신정부에 의해 청산의 대상이 되었고, 검을 빼앗기고 신분과 봉급(녹봉)을 잃었다. 한마디로 '쓸모없어진 존재', 즉 '시대에 뒤처진 전문가'가 된 것이다. 이 시대에 다시 메이지 유신과 사무라이가 부각되는 것은 '쓸모없어짐'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을 자극한 것인지도 모른다. AI의 등장이나 급격한 산업 구조의 변화로 인해 자신의 기술과 경력이 언제든 구식이 될 수 있다고 느끼는 현대인의 정서와 강하게 공명할 수 있는 소재다. 또한, 서구인들에게 '사무라이'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문화적 아이콘이며, 낡은 질서(무사도)는 붕괴했지만 새로운 질서(근대 법치)가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이 '혼돈의 공백기'는 '이쿠카사미'와 같은 '데스 게임' 장르의 무대로서 높은 설득력을 제공한다. 이는 총과 대포가 전장을 지배하기 직전, '검(剣)'이라는 낭만적 무기가 활약할 수 있는 마지막 시대로서 처절하고 화려한 액션 엔터테인먼트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이번에는 소설에서 출발했다. 작가 이마무라 쇼고가 2022년 1월, '새왕의 방패'라는 작품으로 제166회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국민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 상을 수상하고 1개월 만에 나온 작품이 바로 "이쿠사가미" 1권(天)이다. 화제가 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이 소설은 '독서미터 OF THE YEAR 2022' 문고 부문 2위, '시대소설 SHOW 2022' 문고 오리지널 부문 1위를 기록했다. 독서미터는 일종의 독서기록 앱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도 그해 1위를 기록했었다. 2025년 ‘이쿠사가미’는 '천(天)', '지(地)', '인(人)', '신(神)' 총 4권으로 완결되었고, 누계 발행 부수 50만 부를 돌파했다. 10만 부만 넘어도 '히트작'으로 불리는 일본 문고본 시장에서 50만 부라니. 대단한 인기다.
소설만 흥행을 한 것도 아니다. 2022년 12월, 출판사 ‘코단샤’는 만화잡지 ‘모닝’에 ‘이쿠사가미’ 만화 연재를 시작했다. 코단샤가 발행하고 있는 주간 모닝은 20~40대 성인 남성들이 좋아하는 잡지다. 장르적 성격으로 보면 진격의 거인, 공각 기동대, 카드캡터 사쿠라의 코단샤에 걸맞은 작품이기도 하다. 만화 역시 단행본으로 2025년 11월 기준 6권까지 발행될 정도로 순조로운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넷플릭스의 베팅이 성공한 셈이다. 2025년에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출시된 것으로 보면 아마도 소설이 성공하고, 만화가 성공했다는 것을 확신하기 이전에 결정을 한 것일 테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소설 - 만화 - 실사 드라마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원작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기에 IP에 대한 부담도 그리 없었을 것이다.
이번 이쿠사가미는 영화제작사인 '오피스 시로우(Office Shirous)'가 맡았다. 그동안 넷플릭스는 ‘아리스 인 보더랜드’나 ‘유유백서’처럼 VFX에 강한 로봇(ROBOT)과 같은 제작사와 작품을 진행해 왔었고, 토호(TOHO 스튜디오)와 같은 일본의 빅 3 영화 스튜디오와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별나다. 바로 ‘작가주의’ 전문 영화제작사이기 때문이다.
'오피스 시로우'는 "드라이브 마이 카"(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수상), "브로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쿠비"(기타노 다케시 감독) 등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예술 영화' 및 '거장들의 영화'를 만들어 온 프로덕션이다. 넷플릭스가 이들을 파트너로 낙점했다는 것은, '이쿠카사미'를 TV 드라마의 문법이 아닌, 처음부터 '글로벌 스탠더드 품질의 영화'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한 것이다. 이는 일본이 가진 최고의 영상 제작 역량이 내수용 TV가 아닌 글로벌 OTT 시리즈로 향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더구나, 시즌 2를 시작부터 기획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2025년이 되어서야 완결되었다. 2022년 이 작품을 영상화하겠다고 결정한 그 순간 이 작품은 시즌 2가 나와야 하는 작품이다. 이를 그동안 자신들과 손을 맞추었던 제작사가 아니라 오피스 시로우를 선택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점차 일본 영상 시장을 지탱하고 있던 제작위원회 시스템은 해제되고 있다. 매절 계약을 하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성격 탓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한 시대를 지탱했던 시스템 이외의 옵션이 점차 세를 확보해 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인재의 활용 방식 역시 새로운 협업 모델을 제시한다. 주연 배우인 '오카다 준이치(岡田准一)'는 단순히 캐스팅된 배우가 아니라, '프로듀서'이자 '액션 안무가'로서 프로젝트의 기획과 품질 관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할리우드의 톰 크루즈처럼, 최고의 재능을 가진 A급 스타가 자본(넷플릭스)과 직접 결합하여 프로젝트의 창의적인 주도권을 쥐는 방식으로, 제작위원회의 느린 시스템을 거칠 필요가 없는 효율적인 모델이다.
결론적으로, '이쿠사가미'는 글로벌 1위만큼이나 일본 콘텐츠 시장의 변화 가능성을 엿보게 해 준다. 이전과는 다른 시도고, 이전과는 다른 작법이다. 이 한편으로 일본 시장의 변화를 이야기 하긴 힘들겠지만, 거꾸로 오징어게임 이후 한국 드라마 시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기억한다면, 이번 ‘이쿠사가미’ 역시 눈여겨봐야 할 것 아닌가?
'이쿠사가미'는 일본 콘텐츠 산업이 내수 시장의 한계를 넘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고자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자, 가장 완성도 높은 '청사진' 중 하나로 기록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