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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Dec 23. 2021

네 이름은 신자유주의.

<가디언 기사 "신자유주의;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들의 뿌리인 이데올로기(Neoliberalism – the ideology at the root of all our problems. by George Monbiot)"를 읽고>



1학년 1학기가 끝났다. 올해의 영화를 추려낼 때 주로 최신작들이 생각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한 학기를 되돌아볼 때 생각나는 건 가장 최근에 수업들이다. 1학기의 마지막 수업은 사회학이었고, 사회학의 마지막 주제는 세계화였다.


출처:Global Social Theory


미국의 케인즈 정책이 전 세계 경제에 끼친 영향과 그 와중에 3세계 국가들이 미국의 원조*에서 제외되면서 세계적 노동 분화가 나타난 것, 1980년대 신자유주의 바람 아래에서 글로벌 금융 기관인 IMF와 세계은행(WB)이 시행한 구조조정 정책(Structural Adjustment Policies)의 자유화(liberalization)와 민영화(Privatization)라는 조건들, 새로운 모양으로 태어난 제국주의, 그 영향에서 착취받는 3세계 국가의 사람들...


이렇게 나열해놓으니 재미도 없고 무겁기만 할 것 같지만, 1학기 동안 내게 가장 흥미로운 수업이었다. 덕분에 이름도 모른 채 비판해온 대상의 정확한 이름도 알게 됐다. 세상에 대해서 비판적일 때마다 이놈의 자본주의!, 하고 욕해왔는데 사실 내가 욕하고 있었던 건 더 정확하게 신자유주의였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운 시장의 규제 없는 경쟁이 가장 공정하고 이롭다고 믿는 이데올로기다. 신자유주의에서 정부의 복지 제도는 최대치의 이익 달성이 목적인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트리는 악이 된다. 1938년,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 정부 주도 아래 행해지는 복지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개인주의 (individualism)들, 미제스(Ludwign Von Mises)와 하이에크(Friedrich Hayek)에 의해 처음으로 신자유주의가 개념화됐다. 어떻게든 세금을 적게 내고 싶었던 부자들의 열렬한 지지가 뒤따랐고,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선도하는 thinktank들을 만들어 세계 경제와 정치 질서를 바꿔나갔다. 미국에는 닉슨이, 영국에는 마가렛 대처가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이었다. 대처는 가난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누군가 가난하다면 그 이유는 개인적인 결함에 있다.'

누군가 가난하다면 그 이유는 그들에게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케니(경제학자)의 말에 동의하는 나로서는 대처의 인격적 결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가난에 대한 대처의 개인적인 진단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힘과 부를 가진 자들에 의해 이념화됐다. 자본과 권력을 따라 움직이게 된 미디어**는 부자가 되는 것이 정의고 미덕임을,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은 시장의 공정한 원칙으로 생겨난 어쩔 수 없는 탈락임을 사람들에게 주입시켜왔다. 자본과 힘이 만들어낸 진실이 장악한 환경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 대하여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출처: Labor Notes

19세기의 마르크스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 메커니즘을 연구했다면, 21세기의 토마스 피케티는 자본가 계급의 세습되는 재산(wealth)을 바탕으로 가속화되는 부의 편중 현상에 집중했다. 피케티에 따르면 세습 재산의 증가 속도는 사회 전체 부의 속도보다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다시 말해, 피케티는 재산이 재산으로 불어나는 현상(financialisation)이 심화되고 소득에 의해 가능했던 계층 간의 이동이 줄어들면서 사회가 더 가파르게 불평등해질 것을 예견한다. 피케티가 이끄는 세계불평등연구소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전 세계 상위 1%는 세계 자산의 약 34%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50%의 자산 점유율은 2%다. 한국의  경우, 2021년 현재 상위 1%가 25.4%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하위 50%의 재산 점유율은 5.6%다. 소득(Income) 불평등의 양상도 재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평등 지수는 부의 불평등이 불균형을 넘어 기형적임을 알려준다. 자본주의가 브르주아 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의 정당화였다면 신자유주의는 오랜 착취를 근간으로 불평등을 정착화시키고 옹호해오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근 40년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세계의 경제, 정치, 문화를 지배해버릴 수 있었던 이유로, Monbiot는 신자유주의가 아무런 이름을 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현시대가 격고 있는 만병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지목한다. 그는 파울 페르하에허의 책 'What about me?'를 인용하며, '자기혐오, 식이 장애, 우울증, 외로움, 불안 장애와 사회 공포증'과 같은 개인들이 겪는 정신적 병리 현상들이 신자유주의가 불러들인 병임을 상기한다. 우리는 그것의 병폐를 체험적으로 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불평등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안길 뿐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고자 하는 희망을 앗아간다. 사회가 불평등할 때, 불평등을 기반으로 부를 늘릴 수 있는 일부 축척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나아가 신체적 고통에도 놓인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물량을 처리하라는 기업의 압박에 과로하여 목숨을 잃은 일용직 쿠팡 노동자들, 오직 생산성에만 눈이 먼 기업에서 산업 재해로 인해 사망한 2,062명(2020년 기준, 노동부 자료)의 노동자들이 그 예다. 부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성 안에서 자신들만은 끝까지 개인적 일 수 있다고, 안전하다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범죄율도 높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은 불평등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몫은 아님이 분명하다.  사회 속에서 태어난 어떤 인간도 사회를 벗어나 살 수는 없고 사회 속의 개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운명의 한 부분을 담당한다. 신자유주의는 공생 관계인 사람들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의 터를 마련해왔다.   


신자유주의가 부린 가장 눈에 띄는 마법은 투자의 형태를 바꾼 것에 있다. 새로운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해내는 투자는 올드한 방식이 되었다. 돈을 가진 자들은 이자를 통해 불로 소득을 불려 나가길 선호한다.  부와 소득의 격차가 계속해서 벌어지는 와중에 부를 가진 사람들은 세습되는 부를 이용하여 생산(productivity)과는 하등 상관없는 부를 불려 나간다. 최저 임금을 받고 임금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다달이 높아지는 물가와 렌트비, 진전 없는 임금에 억울하지만 별 수 없이 일터를 향한다. 세습되는 부의 회전을 이용하여 불로소득을 축척한 이들은 돈으로 사회적 지위 또한 살 수 있는 반면 세습받을 것 없이 태어난 이들은 사회에서 배제당하는 일에 자연스러워지는 법을 배우며 자란다.

절대적 부와 가난 사이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의 사다리를 오르기로 한다. 돈의 힘이란 부를 가진 자들의 모토를 만인의 모토로 만드는 데에 있다. 우리는 부를 가진 것처럼 쇼핑하고 부를 가질 것처럼 주식 공부를 한다. 우리는 다른 누가 내 자리를 침범하지 않도록 굳건히 지키는 와중에 계속해서 사다리를 오르기로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스템 자체에 의문을 던지기를 포기한다. 시스템이 문제인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사회 구조 안에서 개인들에게 선택권이 얼마나 있을까. Monbiot은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신념을 내면화하고 재생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We internalise and reproduce its creeds'). 그러나 신자유주의적인 세상에서 신자유주의자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


내 몫을 챙길 수 있을지 의문일 때 옆사람 혹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여유는 없다. 신자유주의 세상에서는 개인은 개인을 위하여 개인의 능력을 기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다른 존재가 끼어들 틈은 계속해서 좁아진다. 무한한 시장 경쟁은 사람들을 무한히 이기적으로 부추긴다.

나는 지역 인재 할당제에 대한 사람들의 반대 또한 신자유주의적 시선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지역 인재 할당제는 수도권과 지방 지역 간의 극심한 인프라 및 소득 격차를 줄이고, 자원과 인프라가 밀집된 수도권 사람들과 그것들을 공급받지 못하는 지방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다. 전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중의 하나가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불평등임을 자각하면(환경 문제와 더불어 내게는 불평등이 가장 시급한 지구 문제로 보인다) 할당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논거는 불평등을 부정하거나 불평등을 사회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반대다. 오히려 비판의 주는 할당제 자체가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향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블라인드제만으로도 불평등이 완화될 거라고 말한다. 나는 블라인드제가 가장 일차적인 공평함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할당제는 사회 곳곳에 내재되어 있는 깊숙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 정의로써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혹은 좋은 직장에 입장할 권한을 국가가 제한하는 것을 두고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심정은 이해한다. 다만 심정만 이해한다. '나'의 능력을 나의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울분에 젖었다가 그걸 조금만 더 넓혀서 사회적인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보자. 물질적으로 보다 풍부한 환경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큰 수도권의 아이들은 지방권의 아이들보다 '좋은 대학 진학 및 취직 입장권'을 가질 확률이 훨씬 크다. 이것은 정답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이 바로 자기 자신 덕분이라는 자아도취적인 생각을 선택할 것이지 혹은 부모의 경제적 형편과 자신이 처한 주변 환경 덕분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각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또한 사회계급이 세습되는 불평등이 자명한 현실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결책들을 도입할 것인지, 그것을 여전히 개개인의 능력 문제로 남겨둘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신자유주의는 부와 능력이 세습되는 구조를 자유 경쟁이라는 단어로 포장하여 사회 구성원들을 유인하고, 경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가둬두는 것을 공정이라 말하며 정당화한다. 개인이 개인이 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좁은 사고의 올가미를 우리들에게 덫씌우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능력이다.


신자유주의는 세습 자본주의를 도모해왔고, 시민을 소비자로 전락시켜왔고, 경제와 정치의 영역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도 불행하게 만들어왔다. 이렇듯 실패한 신자유주의가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을 부리며 사라지지 않고 머무는 이유는 우리에게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고 Monbiot가 말한다. 대안은 정말 없을까.


출처: Giving compass


대안이 있고, 변화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고 믿고 싶다.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고 믿는다. 여기 나, 나와 같이 살고 있는 남자 친구, 나의 가족, 나의 친구들, 나와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 그리하여 생각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 우리들이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브레흐만이 책 '휴먼 카인드'에서 주장한 것처럼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서 가장 큰 힘을 부리고 살 수 있는 원인이 사회성(연결성) 덕이라면 인간은 이 선천적 능력을 좀 더 생산적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노예제가 폐지될 수 있었고, 민주 정치가 하나의 기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페미니즘이 여성들에게 목소리를 준 인간의 역사를 보면 그의 주장이 순진하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인간들이 서로의 선한 가능성들을 믿고 보이지 않는 손을 잡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한 때 유토피아라도 믿었던 것들이 현실화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브레흐만이 쓴 책 중에 'Utopia for realists'라는 책을 최근에 재밌게 있었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시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만든 병적인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손을 사람들이 함께 잡았으면 좋겠다.



출처:CAUT


자유를 위시하여 규제 없는 무한 경쟁 시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불평등을 앞에 두고도 작은 정부를 주장하며 민영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표를 그들에게 붙이기로 한다. 이름 없는 신자유주의에 이름표를 붙여주고 그것의 해악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우리가 함께 보이지 않는 손을 잡다 보면 지금보다는 살만한 불평등이 오지 않을까. 불평등이 사라지는 세상을 꾸꾸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마주한 불평등이 납득할 수준의 불평등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기계의 부속품(appendage)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부속품 같은 노동자들이 없으면 자본가들이 자본가가 될 수 없었을 거라는 인식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부유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야말로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따라서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진짜 힘은 평범한 우리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믿음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고 바꾸는 주체가 또 사람들임을 생각하면 힘은 이곳에도 분명 있다.  



*원조 말고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데, 원조라는 단어도 마땅한 단어가 아닌 것 같다. 미국의 마셜 플랜(Marshall Plan), 그들이 홍콩, 한국, 멕시코, 인도 등의 나라들을 재정적인 지원한 것에는 이념적인 이유와 시장을 넓히고자 하는 숨은 목적이 있었으니까, 마냥 도와줬다고만 할 수 없지 않은가.


**Manufacturing Consent: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ass Media (Book by Edward S. Herman and Noam Chomsky)


출처: Neoliberalism – the ideology at the root of all our problems by George Monbiot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6/apr/15/neoliberalism-ideology-problem-george-monb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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