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리에 가 보았어요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화장실 보다 더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곳이 나에겐 공항이다. 아무리 짧은 1박이어도 제주도를 향해 들어서는 ‘출발’층과,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하는 ‘출발’층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앞의 출발장은 부스터라도 장착된 신발을 신은 것 같고 뒤의 공항은 발목에 모래 주머니를 찬 것도 모자라 운동화마저 쫄딱 젖어 무겁게 옮기는 발걸음 같다.
집을 떠나 공항에 도착하면 뒤 돌아보지 않고 탑승구까지 직진한다. 유리창 밖으로 육중한 몸체를 드러낸 비행기를 바라보며 열려라 참깨! 아이 같은 주문도 중얼거리면서 시간을 기다린다. 짜릿한 설렘이 일고 세상 더 없는 여유로운 마음과 웃음이 번진다.
이때는, 탑승구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이 때, 탑승구 언저리에 붙은 디지털 시계의 깜빡임마저 내게 보내는 윙크 같아 보이는 이 때는, 아이가 내 옷에 음료수를 튀기거나 아이스크림을 바른 대도, 웃으며 수습과 다독임이 가능한 때이다.
여행 동안 대부분 업 된 상태가 유지된다. 좋은 기운이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걸 몸으로 느낀다. 한 곳 두 곳, 한 끼 두 끼, 하루 또 하루… 일정을 채워가는 나를 볼 때, 내가 봐도 참 이보다 더 만족 스러워 할 수 없는 내 모습에 놀란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단 말야? 여행하는 자아가 따로 있는 것처럼 내가 꼭 둘인것 같다.
태어나서 이날 입때까지 서울에서만 살고 있는 나에게 혹시 설문대할망의 피가 흐르기라도 하는건가? 조상의 일들이 궁금해지는 순간도 온다. 여행 내내, 밟고 선 제주 땅에 무한 애정과 그리움을 아주 그냥 넘치게 느낀다.
하지만 고점을 향해 가던 감정은 흐르는 시간을 따라 변화를 일으킨다. 당연하지, 보낸 날이 더 많아 돌아가야 할 날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마지막 밤을 앞두고 형편은 가장 어려워진다. 자꾸만 울 감이 들고 약간은 심술이 나기도 한다. 바로 요 때, 늘어놓고 쓰던 ‘살림들’이 다시 꾸려야 할 ‘짐들’로 인식 전환이 되시 시작하는 때, 비었던 트렁크에 하나 둘 짐들이 들어차기 시작할 때는, 아이가 벗어 놓은 양말 한 짝에도 땅이 꺼지는 한숨이 나오는 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싶은 엄숙하고 진지한 몸과 마음으로 마지막 밤을 알뜰 살뜰 보낸다. 마지막 밤은 대체 어디서 오길래, 꼭 오고야 마는 걸까. 제주 땅에 마음껏 부려 놓은 오감과 활짝 열어 멀리까지 펼쳐 놨던 상상, 기대들을 마지막 밤엔 다시 끌어 모은다. 이 밤의 끝은 그렇게 잡아 끌 듯 추스르는 시간이다. 다음 여행은 또 있겠지만 이번은 이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진 폴더를 만들 듯, 이번 여행에 적합한 테그를 달아 여행 목록에 채워두려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공항을 향해 바퀴를 굴려야 할 시간이 저벅저벅 우리 방 문을 열고 들어온다. 요 때는 말 그대로 빼도 박도 못하는 때. 렌터카 반납과 비행기 탑승이란, 지키지 않는다면 크게 낭패를 볼 수 있기에,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역할 수 없는 몸부림 운전이 시작된다.
느리게 차를 몰아 공항으로 돌아갈 때, ‘이호테우 해수욕장’ 이정표를 본다. ‘이호테우 해수욕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도로마다, 교차로마다 자꾸 등장한다는 것은 공항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동쪽에서 올라가든 서쪽에서 올라가든 남쪽에서 중앙으로 올라가든, 그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나에겐 ‘집’ 이다. ‘이호테우 해수욕장’은 내게 말하는 것이다. ‘너 이제 그만 놀고 집에 가라’.
마음이 무거워진다. 다시 또 온다 해도 지금은 안녕. 5년씩 같은 사람과 연애를 할 때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이토록 서글프진 않았던 것 같다. 아무렴, 나는 이정표대로 해야 한다. 그 메시지 역시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계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이호테우 해수욕장은 도착해서 보다 육지로 떠날 때 들렸다 가는 마지막 코스인 것 같다(해수욕장 주변에 숙소가 있지 않은 경우에 말이다). 그 이유를 가늠해 보자면 아마도 한 번 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풍경을 마음에 담고 지난 시간을 새겨보기에 완벽한 장소이기 때문은 아닐까.
나도 그렇게 딱 한 번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다. 여행 끝 날, 렌터카를 반납하기 전 마지막 여정으로. 이호의 상징, 하얀 말과 빨간 말 등대는 우뚝 선 채 말이 없다. 짧았던 일정들을 복기하며 언제고 다시 또 내리자고 다짐했던 것 같다. 떨어지는 기운, 서러운 마음을 간직한 채 조랑말 한 쌍을 애써 외면하고 돌아서던 발걸음이 기억난다. 그 이후로 더 이상, 그 곳엔 가지 않는다.
도로의 이정표로 느끼는 '이호테우 해수욕장'의 존재감만큼, 설레는 임팩트를 풍기는 또 하나의 풍경이 있다. 바로 비행기에서 그곳이 보일 때이다. 누구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조랑말 한 쌍 덕분이다. 가까이서 보면 압도적인 크기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쌍수를 들고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다. 내릴 때 본다면 더 없는 환영인사겠고 오를 때 본다면 서운한 마지막 인사쯤 되겠다.
내가 본 '조랑말 쌍수'는 제주도를 떠날 때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정표도 두 마리 간세도 나에겐 모두 작별이다. 물론 나와 다른 추억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일 뿐.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이호테우 해수욕장' 이정표는 여행자의 여정을 도울 것이고 빨간 말과 흰 말은 그들의 추억에 포개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