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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크한 유니씨 Aug 27. 2020

<들어봐, 여행>

- 하도리에 가 보았어요

말이 많지 않은 편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주도하기 보다 잘 듣는 애, 어릴 때부터 나다. 말을 잘 옮기지도 않는다. '이거 어디 가서 말하면 안돼' 나에게 단서를 붙인다면, 그러지 않아도 잘 안 하는 말, 내 입에서 나올 일은 거의 없다. 말이 없어서 나만 아는 부작용도 있다. 점점 말 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쓰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직 평생 쓰고도 남을 펜이 열 두 더즌도 더 남아있다!

할 말은 하지만 할 말만 하기에 말 잘 하는 재주는 내게서 멀다. 말솜씨로 좌중의 시선을 모으고 그 눈들을 반짝이게 만들거나 끄덕이는 고갯짓을 끌어내는 ‘자기주도 이야기’ 가 잘 되는 화자들이 참 대단하다 싶다.


내가 잘 듣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윤팔, 너는 참 경청을 잘 해”. ‘자기주도 이야기’가 잘 되던 한 친구가 말했다. 우르르, 친구들과 같은 영화를 보고 다 같이 수다를 해도, 어쩐지 이 친구 이야기를 들어야 영화가 끝난 것 같이 말 빨 좋은 친구였다. 모두 한마디씩 소감을 늘어놔도 마무리는 꼭 얘가 하고 있는, 그런 화자가 나에게 건넨 한마디였던 것이다, ‘경청’.


친구의 말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단어를 그 때 처음 들었기 때문에. 경청이란 말에서 뭐랄까, 조금 진중하거나 어른스러움을 감지했던 것 같다. 친구들이 여럿이었는데 유독 나에게만 ‘경청’이라는 말을 써 준 까닭도 그래서인 것 같았다. 경청이란 일종의 태도였음을 그땐 알지 못했다. 어쨌든 경청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중학교 3년 내내 편지를 주고 받았다.


잊고 있던 ‘경청’을 인상깊게 영접하게 된 날이 있었으니, 바로 첫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때. 회사는 여의도의 오피스 빌딩이었는데, 출근 시간은 9시였지만 10시가 지나야 업무가 시작되었다. 8시 30분이면 직원들은 대부분 출근, 마음 맞는 몇몇은 지하 매점으로 내려가 대표의 출근 전 시간을 즐겼다.


그때는 그런 매점이 있었다. 간이계산서나 우편 봉투, 각도기 같은 것을 팔면서 출근 무렵이면 김밥이나 삶은 계란, 라면 같은 걸 팔기도 하는, 문방구도 아니고 분식집도 아니면서 문방구이기도 하고 분식집이기도 한, 말 그대로의 매점. 사무실에 똑 떨어진 비품을 어찌 그리 잘 알고 딱 갖춰 놓았는지, 출근에 무슨 재미가 있겠냐만 출근할 맛 만큼은 딱 알맞게 돕던 약방의 감초 같은 그런 매점.

숲으로 숲으로, 숲의 소리를 들어봐  _20200531제주곶자왈도립공원

연배 있는 부부가 운영하던 매점은 안 그래도 작은 공간에 문방구와 주방을 동시에 들여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다 내 준 내외가 각자 자리에 있어도, 아침 요기 손님들과 일행인 것처럼 자리가 좁았다. 그러니까 사장 내외나 손님들이나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얼마든지 들으면서 앞 뒤 서사도 짤 수 있었단 얘기.


그 날도 나까지 셋이 매점으로 내려갔다. 1번 선배는 라면을 주문하고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챙겼다. 2번 선배는 계란 껍질을 까며 시계를 쳐다봤고 나는 믹스커피를 뜯었다. 대표 이하 상사들의 네버엔딩 뒷담으로 허기를 달래는 동안 음식이 나온다. 1번 선배는 말을 좀 잘 한다. 상사들의 뒷담 뿐 아니라 잘 안 풀리는 자신의 연애담까지, 이어지는 라면가락처럼 이야기가 늘어진다. 2번 선배는 1번이 그러거나 말거나 라면 그릇에 코를 박고 저작운동에 힘쓴다. 밥을 좀 늦게 먹는다. 나는 1번 선배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김밥 포일을 벗긴다. 아침을 좀 먹고 왔다.

1번은 먹으면서도 말이 많았고, 2번은 듣는지 안 듣는지 말이 없고, 나는 놓치지 않고 다 들으면서도 말이 없다. 그렇게 매점에서의 조찬 회동이 일주일이면 두 세 번, 두 세 달 쯤 이어지던 어느 날, 사장님이 하루는 한 말씀 하시는 거다.  


 “아가씨는 사업을 해도 참 잘 하겠어요.”

 “네? (아가씨가 영화 제목인 줄만 알겠지만 저렇게 호칭으로도 쉽게 쓰이던 시절) 사업이요? 갑자기…, 왜요?” 

이제 갓 사회에 진출, 첫 월급 받은 지가 고작 몇 개월 전인데 사업이라니, ‘경청’을 처음 들었을 때 보다 더 놀라운 진단이었다.

 “가만 보면 아가씨는 남의 말을 잘 들어줘요.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아주 경청을 해요. 남의 말 잘 듣는 사람이 사업 하면 잘 되지.”


3년 내내 편지를 주고 받던 친구가 떠올랐다. 나는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남들은 알고 있는 나의 어느 한쪽 스타일이 형성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아직'사업가가 되진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듣는 일을 좋아한다. 들으면서 본다. 화자 특유의 말솜씨나 버릇, 눈동자의 흔들림, 호흡, 과하거나 잔잔한 제스쳐, 눈을 맞추고 웃거나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들. 화자는 자기 말을 들어주니 좋겠지만 사실 나 역시 그 세계에 빠져드는 중이다. 마치, 비어 있는 행간을 읽어내며 작가의 세상에 적극 개입하는 독자처럼, 화자가 이야기로 드러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며 기꺼이 입장한다. 재미있다, 그렇게 듣는 일은. 


누군가를, 무언가를 보고 듣는다는 건, 너의 세상에 내가 들어가도 되는지 묻는 나의 첫 번째 태도다. 너에게 깊이 공감하겠다는 마음이다. 그러니 다시 경청이다.

어떤 보고 듣는 일들은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 쓰는 일로 매듭 된다. 나에게 이야기가 생기는 것이다. 쓰면서 나아가는 세상으로 내가 연결된다. 


여행도 내겐 듣는 태도에 가깝다. 내가 몰랐던 세상으로 나서기 위해 먼저 들어야 한다. 미지의 세상에 발을 디뎌도 될지, 그곳에 감각을 풀어 나만의 서사를 이어도 될지 그 답변을 기다린다. 여행이, 스치는 장면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로 기억되는 까닭이다. 삶도 그럴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와 마주하며 내 안의 울림에 마음 기울이는 일. 그렇게 삶을 써나가면 좋겠다. 


여행은 화자를 앞에 앉힐 수 없는 법, 오래 다져 더 없이 숙련된 경청의 자세를 갖춘 내가, 삶 그 곳에 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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