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리에 가 보았어요
오늘도 당근을 채 썬다. 당근라페. 맘 잡고 만들어 두면 끼니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훌륭한 먹거리가 된다. 치즈나 계란 대신 식빵 위에 올리기도 하고, 밥이랑 김에 싸서 먹어도 맛있다. 밥, 빵이 싫을 땐 두부랑 먹고 이도 저도 안 땡길 땐 당근라페 하나만 먹기도 한다. 짜지 않게 간하고 숟가락으로 푸거나 포크로 푹푹 찍어서 꼬드득 꼬드득 씹어 먹는다. 요 때, 진한 커피를 같이 마시면 뭔가 갖춰진 한 끼를 누리는 것 같다. 당근 하나로 참 풍요롭기도 하지.
마트에서 흙 당근 세 개, 한 봉지를 샀다. 봉지 겉면에 ‘제주 구좌 당근’ 글씨가 반갑다. 당근라페는 채 써는 일이 전부다. 채 썬 당근에 소금, 올리브유, 식초, 후추를 뿌리면 끝. 씨 겨자 소스나 꿀을 넣기도 한다는데 난 넣지 않는다. 당근을 소금에 먼저 절여 좀 더 쫀쫀한 식감을 내기도 한다지만 굳이 하지 않는다. 씽크대 앞에서 최소 시간을 들이고 최대한 간편하게 먹자는, 몇 년 전부터 장착한 먹고살기 마인드를 유지 중이다. 웬만하면 과정을 생략하고 재료를 줄인다. 시간이 남고 맛은 자연에 가까워진다.
당근은 사계절 내내 먹지만, 나는 안다. 당근은 겨울이 제철이라는 것을. 하도리가 있기 전까지 당근은 나에겐 당근,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도리에서 당근밭을 처음 보았다. 우리가 머물던 숙소 '잠시라도'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15분 정도 걸어 나가는 전형적인 시골길인데, 당근밭만 보면서 걸었다 해도 될 만큼 당근밭이 많았다. 전국 당근 생산량의 70%가 여기, 구좌읍에서 나온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제주도가 처음이 아닌데 당근밭은 처음이라니 새롭고도 신기했다.
첫날은, 초저녁에 도착했지만 금세 주변이 깜깜해진 시골 마을의 1월 저녁이어서 주변의 당근밭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당 밖이 밭인지 바다인지, 숲인지 낭떠러지인지, 현관으로 이어진 유도등이 있긴 했어도 눈앞과 발밑은 온통 검정색 이었다. 집 안까지는 잘 찾아 들어왔지만 정작 우리가 택시를 타고 들어온 길, 몇 발짝 걸어들어온 올레와 마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 채 첫날밤을 보낸 것이다. 자면서도 궁금했다면 오바겠지만 아침이 오면 마당부터 내려가 봐야지, 잠들기 전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날이 밝고 눈을 뜨자마자, 마당에 내려섰다.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 우리가 걸어들어온 ‘문주란로 34-2’, ‘잠시라도’ 마당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본다. 온통 검정색이던 어젯밤과 달리, 아무리 멀리 시선을 던져도 막히지 않고 쭉쭉 뻗어 나가는 시야가 서울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올레를 따라 마당을 벗어나 길에 나서본다. 넓고 평평한 밭들이 이어져 지평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까만 돌담이 울타리를 만드는 밭이라니 여기,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구나 싶었다.
근데 잠깐, 뭔가 남달랐다. 밭이 막,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반짝이는 느낌까지. 한겨울에 흔히 볼 수 있는 마르거나 언 땅이 아니었다. 아직 밭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끝나기는커녕 지금이 제일 바쁜때라고, 말은 없지만 말하는 것 같았고 움직임은 없어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밭의 생동감이 느껴졌는데 흙 색깔 때문이었다. 밭의 흙이 볶은 커피콩처럼 까만 데다 윤기가 좔좔 흘렀다. 윤기때문인지 흙에서 찰진 느낌마저 들었다. 처음 보는 흙빛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 까만 흙 위에 연두색 이파리가 빽빽했는데, 초록이 아니고 연두라는 게 중요하다. 야들야들, 로즈마리처럼 가늘지만 평면이고 얇고, 고수같이 여리여리 하지만 훨씬 옅고 부드러운 이파리들. 겨울 한복판에 숨 쉬는 까만 흙과 연두 이파리라니. 검정과 연두의 조화로움이 뿜어내는 찬 바람 속 기운은 그야말로, 부드러우면서도 눈부셨고 아름다우면서도 강했다.
이파리도 흙도 만져보고, 손으로 이파리를 쓸어 냄새도 맡아본다. 찾아보고 나서 알았지만 이게 글쎄, 당근이란다. 그러니까 이 까만 흙 아래엔 당근이 묻혀있고 그 당근에서 연두 줄기가 뻗고 이파리가 솟아나, 까만 밭에 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말이지, 40여 년을 지탱해 온 짧은 지식과 상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 그러나 기분 좋은 와르르였다.
그렇게 당근밭을 보고 나서 마법처럼 당근이 좋아졌다. 비로소 당근을 느끼기 시작했달까. 계란찜이나 카레에 단골로 등장하지만 순전히 구색맞추기로 소용되던 당근이었다. 하지만 이제 당근은 하나의 독자적인 반찬으로 식탁을 차지한다. 그리고 또 하나, 당근을 고르는 일에도 신경 쓰게 되었다. 반질반질 닦인 세척 당근보다 부스스 떨어지는 게 많아도 흙 당근을 고른다. 씻기 전에 코끝에 대고 흙냄새도 한번 맡아 본다. 그것이 제주도의 검은 밭에서 왔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검디검은 흙을 씻어내고 마주하는 주황색이, 하도리 당근밭이 품고 있던 그 뿌리라고, 그래서 내 식탁은 여전히 하도리와 연결돼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끝>